가족의 이야기

같은 편이라는 말이 필요해

글 : 김지영

자다가도 일어나 시간 맞춰 피딩을 하고, 항경련제 먹일 시간을 놓칠까 늘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30분에 5만원 가까이 하는 재활치료에 늦지 않으려 분주히 움직이고, 아이가 기관절개와 위루관을 하고 있다 보니 감염 위험 때문에 손도 자주 씻게 됩니다. 의료비 부담을 줄여주는 중증질환 산정특례 기간이 끝나기 전에 다른 질병코드로 받을 수 없을지 미리 정보를 찾아봅니다. 그런 나를 보며 남편은 종종 “예민하다”고 말합니다. “내가 예민한 게 아니라, 지금 이 상황이 나를 이렇게 살 수밖에 없게 만든 거잖아!” 아이도 아픈데 남편과의 관계까지 틀어지면 버틸 자신이 없어서,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을 삼킬 때가 많습니다. 한편으로는 남편의 말 때문에 정말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인가 의심하게 되기도 합니다. 문득 떠올려봅니다. 나는 원래 어떤 사람이었을까.

바쁜 것은 사람을 악하게 만든다

나는 원래 시간 약속을 잘 못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회사다닐 때는 지각도 자주 했죠. 그런 내가 지금은 아이들 스케쥴에 쫓기며 분 단위로 살아가는게 얼마나 버거운 일인지 모릅니다. 예전의 나는 출근길에 마주치는 나무에 꽃이 피고 잎이 지는 걸 보며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감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쁜 도시 사람들 틈에서 나름의 여유와 풍류를 즐기던 사람이었죠. 그런데 지금의 삶은 내가 원했던 모습과 너무 다릅니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휴식과 여유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며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학생들을 상대로 이상한 실험을 했어요. (중략) 바쁜 사람은 쓰러진 사람을 본 척 만척하고 지나갔고 여유가 있는 사람은 도와줬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우리 모두 다 조금씩 선하고 조금씩 악하잖아요. 그렇다면 언제 사람이 좀 강퍅해지고 약해질까? 저는 그게 바쁠 때 같거든요. 그래서 바쁜 것은 악에 가까운 것 같아요.”
정말 그래요. 나는 첫째가 무언가를 하는 걸 느긋하게 기다려주지 못했습니다. 등원길에 길가에 핀 꽃을 만져보고 싶어 해도 “빨리 가자”며 손을 잡아끌었습니다. 유치원에 데려다주자마자 둘째와 치료실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밥을 먹다 재미있는 생각이 났는지, 입 안 가득 밥을 문 채 신나게 이야기를 시작하면 나는 밥 먹으면서 말하라고 재촉했습니다. 속으로는 ‘엄마랑 이야기하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 말할 맛 떨어졌겠다’ 싶으면서도요. 그렇게 나는 점점 ‘불친절한 엄마’가 되어갔습니다.

보이지 않는 기획노동에 잠식되는 엄마들

늘 정보가 고팠던 나는 머릿속까지 늘 바빴습니다. 장애인 복지, 의료비 지원사업, 가족 프로그램.. 즐겨찾기 해둔 사이트를 수시로 들여다보고 뉴스레터나 카카오톡으로 소식을 받아보며 매일 정보로 나를 살찌웠습니다. 그렇게 얻은 정보들은 결국 전부 ‘내가 해야 할 일’이 되었죠. 한동안은 내가 낸 세금보다 더 많은 혜택을 돌려받는 것 같아 뿌듯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니 공장식 농장의 좁은 우리 안에서 살만 찌는 돼지처럼 머릿속이 꽉 막힌 기분이 들었습니다. ‘내가 뭐하려고 했더라?’, ‘뭐부터 해야하지?’ 따위의 말을 입에 달고 살았죠.
처음에는 휴대전화 메모장에 할 일을 빼곡히 적어두었지만 자꾸 기한을 놓쳐서 알림 앱으로 옮겼습니다. 오늘 할 일, 매주/매월 할 일, 언젠가 시간 나면(하지만 영원히 못할 것 같은) 할 일 등으로 목록을 나누고 날짜와 시간을 배분해 알람이 울리도록 설정했습니다. 그렇게 더 생산적인 엄마가 되는 대신, 나는 무엇에도 집중하지 못할만큼 정보에 압도되어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접한 기사에서 나를 짓누르던 것이 ‘기획노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획노동은 가족생활 전반을 계획하고, 정보를 찾고, 미리 대비하는 노동입니다. 청소나 빨래처럼 눈에 보이는 실행노동과 달리 잘 드러나지 않죠. 그런데 이 일을 대부분 아내가 맡게 된다고 합니다. 2024년 한국갤럽은 기획노동을 추가해 ‘가사노동 실태’를 새롭게 조사했습니다. 월간 가사노동 시간에서 남녀 격차는 실행노동은 2.9배, 기획노동은 3.4배에 달했습니다. 장애 자녀가 있는 가정이라면 그 격차가 훨씬 더 클 것 같습니다. ‘OO제출’, ‘△△만들기’, ‘XX예약’ 내가 깨어 있는 동안 휴대전화에는 이런저런 알람이 울립니다. 하지만 오래전에 냉장고에 붙여둔 다이어트 자극 사진처럼 제역할을 못하고 있어요. 가사와 육아처럼 당장  처리해야하는 일때문에 자꾸 미루게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미뤄도 되는 일도 있지만 시간 맞춰 약 먹이기, 의료소모품 재고 관리처럼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런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보니 나의 하루는 늘 긴장의 연속입니다. 머리는 하루 종일 풀가동 상태인데 눈에 보이는 결과물은 별로 없으니, 하는 일 없이 바쁜 것 같고 자괴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젠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고, 지금의 내가 진짜 나인지조차 헷갈립니다. 이 무슨 사춘기 같은 고민인지.

아내에게 이렇게 말해주세요

마흔이 넘어 찾아온 두 번째 사춘기 같은 시간을 지나며, 남편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걸 느낍니다. 남편은 부탁하면 집안일을 잘 도와주는 편입니다. 그럼에도 기획노동을 전적으로 맡은 나와, 주어지는 일을 수행하는 남편 사이에는 깊은 간극이 존재했습니다. 이러한 나의 힘듦을 남편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니었어요. 흔히 남자들은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고 하는데, 나 역시 힘든 걸 시시콜콜 말하는 성격이 아니었고 주말부부 생활도 그 거리감을 더 키웠습니다. 이건 우리 집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장애 자녀를 키우는 엄마들을 보면 남편의 이해와 지지를 받는 사람과 핀잔을 받는 사람, 크게 두 부류로 나뉘는 것 같습니다. 나는 그 중간 쯤에 속해서, 남편의 응원과 핀잔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며 흔들리고 있었죠. 쓸데 없는 걱정한다, 예민하다… 그런 말을 듣다 보면 억울함이 차오릅니다. 내가 이렇게 사는 건 원래 이런 사람이라서도 아니고, 당신이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처럼 속 편한 소리 할 수 있는 건 하루 종일 내가 살아내는 세계一숟가락이 있어야 할 자리에 주사기가 있고, 아이들 속옷이 있어야 할 자리엔 여전히 기저귀가 쌓여있는一에서 일정 수준 떨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나도 대충 살고싶어요. 그런데 서로 완전히 다른 도움이 필요한 두 아이를 키우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는 하루하루가 너무 버겁다고요. 아내가 예민한 것 같나요? 엄마가 되고 나서 삶이 180도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처음이고, 혹시라도 놓치는 게 있을까 늘 긴장 속에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핀잔을 던지기 전에 아내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 주길, 그리고 이렇게 말해주길 바래요. 남편이 나와 같은 편이라는 감각만으로도 아내는 훨씬 덜 외로워집니다.
남편: 왜 이렇게 부정적이야? 닥치면 다 되는데 미리 쓸데없는 걱정 좀 하지 마.
아내: (닥치기 전에 내가 미리 다 해결하고 있다는 걸 왜 몰라줄까…)
>> 걱정되는구나 / 불안하구나 / 미리 대비하고 있었네 / 내가 도와줄 건 없어?

남편: 예민하네, 과민반응이야, 완벽주의 같다, 너무 까다로운 거 아냐?
아내: (나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아. 병원에서 이렇게 하라고 했단 말이야…)
>> 우리 아이 아프지 않게 돌보려면 이렇게까지 신경 써야 하는구나. 난 잠깐이지만 넌 하루 종일 얼마나 신경 쓰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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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학교에 다닌다면? 개별화교육회의 빠지지 마세요

글 : 김지영

장애의 종류가 같다고 해서 발달 수준과 특성까지 같지는 않죠. 그런 아이들을 한 교실에 모아 두고 모두에게 같은 것을 같은 방법으로 가르친다면 어떨까요? 새 학기를 맞아, 학교에서 아이의 1년을 어떻게 보낼지 결정하는 자리인 ‘개별화교육회의’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특수교육의 꽃을 ‘개별화교육계획(IEP, Individualized Education Program)’이라고 하더라고요. 이 계획을 수립하기에 앞서 진행하는 과정이 바로 ‘개별화교육회의’입니다.

개별화교육회의란?

개별화교육회의(IEP 회의라고도 합니다)는 서로 다른 장애 학생 개개인의 발달 수준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교육 목표와 지원 방안을 세워 1년간의 교육을 계획하는 자리입니다. 입학 후 14일 이내 진행되어야 하는 법적 필수 회의이지만, 부모가 회의의 중요성을 잘 모르거나 바쁘다는 이유로 서류에 서명하는 것으로 부모의 참여 없이 마무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부모가 이 회의에 직접 참석하느냐에 따라 아이의 학교생활은 꽤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제하가 특수학교 유치부에서 초등학교 1학년으로 진학하면서, 올해 첫 개별화교육회의에 참여했습니다. 회의 참석자는 특수교육 대상 학생의 보호자가 요청할 수 있습니다. 담임교사를 비롯해 교과교사, 보건교사, 영양사, 심지어 학교장까지도요. 지난해 처음 회의에 참석했을 때는 제하가 만나게 될 선생님들을 모두 모시도록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담임 선생님과 만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다른 선생님들께는 문서로 내용을 공유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보호자는 자녀의 특성과 필요 사항(강점, 약점, 필요한 지원)을 미리 정리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제하의 의료 정보, 발달 수준, 건강 상태, 일상 등에 대해 자세히 기록한 문서(이 것에 대한 글은 기록의 쓸모라는 제목으로 지난 칼럼에서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를 회의 전에 미리 선생님께 메일로 보내 두고, 회의 때 강조해서 이야기할 내용은 따로 메모해서 가져갔습니다.

제하의 개별화교육회의 모습 함께 살펴볼까요?

회의는 개학 후 한 주 동안 제하가 학교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담임교사가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제하는 전반적으로 수업에 즐겁게 참여하고, 특히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것을 좋아하며 호명에도 잘 대답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놀라 다시 물었습니다. 정말 제하가 자기 이름을 확실히 아는 것 같냐고요. 지난해 회의에서 세웠던 목표 중 하나가 ‘호명에 대한 반응 향상’이었는데, 1학기까지만 해도 제하는 다른 친구 이름을 불러도 대답했기 때문입니다. 집에서도 일부러 형 이름을 불러 보면 제하가 대답하곤 했습니다.
보세요. 회의 첫 이야기부터 저는 제하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를 새로 만난 사람이라도 시간이 조금 지나면, 결국 선생님들(교사, 치료사, 활동지원사 등)이 부모보다 아이를 더 잘 알게 되는 순간이 옵니다. 부모가 바빠 전화 상담으로 회의를 대신하기도 하지만, 비대면으로 주고받는 이야기와 직접 마주 앉아 나누는 대화는 깊이와 넓이가 꽤 다르다고 느낍니다. 선생님과 대면해 이야기할 기회가 생기면 놓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어서 담임 교사는 제하가 3~4교시쯤 다리가 떨리고 피곤해하는 모습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발목 보조기 때문일 수 있어, 3교시 이후 특히 힘들어 보일 때는 보조기를 풀어 보기로 했습니다.
다음은 제 차례였습니다. 저는 1학기 목표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유치부 때와 완전히 다른 목표라기보다, 지난해 목표에서 이어지는 내용이었습니다. 먼저 구글문서로 만든 ‘의사소통사전’을 공유했습니다. 제하가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정리한 자료로, 집·학교·치료실에서 일관되게 반응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음은 선택의 기회를 늘리는 것이었습니다. “앉을까, 누울까?”, “이 책 읽을까, 저 책 읽을까?”처럼 활동을 직접 고르게 하면 일상이 즐거워지고 의사소통도 좋아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또 CVI 특성을 고려해 빛을 활용한 놀이를 하고, 학습 자료는 시각적으로 단순화하되 촉각도 함께 활용하기로 했습니다. 간식 시간에는 씹는 연습을 하기로 했습니다. 발관을 위해 턱뼈 발달이 필요하지만 평일에는 집에서 시간이 부족해, 우유 급식 시간에 간식으로 연습하고 활동지원사가 우선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다음은 근골격계 문제였습니다. 수업 중 자세를 신경 써 달라고 부탁했고, 고관절 탈구 예방을 위해 기립기에 하루 2회 서는 과제를 주 2회 신체활동실 이용 시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수업 중 기립기 사용은 집중이 어려울 수 있어 한 달 정도 지켜본 뒤 다시 판단하기로 했고, 녹음형 버튼(AAC) 문구는 4월 이후 선생님 의견을 받기로 했습니다. 이렇듯 회의에서는 부모인 저보다 비슷한 학생들을 많이 지도해 온 선생님의 경험과 의견에 기대는 순간도 많았습니다.
부모는 집에서의 아이를 가장 잘 알고, 선생님은 학교에서의 아이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봅니다. 두 이야기가 한 자리에서 만나야 비로소 아이에게 맞는 교육 계획이 만들어집니다. 회의에 참석하는 데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 뿐이지만, 그 시간은 아이에게는 1년의 방향이 됩니다. 특수학교에 다니는 아이라면, 개별화교육회의만큼은 번거롭더라도 꼭 참여해 이야기를 나눠 보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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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 자녀를 키우는 엄마의 인공지능 챗봇 활용법

글 : 김지영

장애가 있는 자녀를 키우는 부모의 하루는
행정, 의료, 교육, 감정 노동이 동시에 굴러가는 복합 시스템에 가깝습니다.
치료 일정 조율, 학교•기관과의 소통, 복지 정보 탐색,
그리고 아이의 작은 신호를 놓치지 않기 위한 긴장까지.
인공지능(AI) 시대에도, 부모는 여전히 이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해야 할까요?
장애 자녀를 둔 부모를 위해, 인공지능 챗봇을 비서처럼 활용하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아이의 패턴을 읽는 법, 챗봇이 도와줍니다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은 정보 정리입니다. 장애 아동 양육은 정보 격차가 곧 삶의 질 격차로 이어집니다. 산정특례, 복지서비스, 교육 지원 제도는 존재하지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습니다. 챗봇은 이 복잡한 정보를 부모의 상황에 맞게 재구성하는 데 유용합니다. 예를 들어 아이의 진단명과 연령, 거주 지역을 기준으로 ‘지금 신청 가능한 제도’를 정리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모든 제도를 전문가처럼 꿰고 있지 않아도, 질문할 수 있는 창구가 늘어나는 셈입니다.
건강 기록과 관리에서도 유용합니다. 장애 아동의 건강과 발달은 ‘패턴’이 중요합니다. 하루 이틀의 변화보다 몇 주, 몇 달에 걸친 미묘한 차이가 의미를 갖습니다. 챗봇을 활용해 아이의 식사, 배변, 수면, 통증 반응, 경련 주기, 행동 변화를 간단히 기록하고, 이를 요약해 병원 진료나 상담 때 활용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기억에만 의존하던 파편적 정보가 구조화된 데이터로 바뀌는 순간, 진료실에서의 대화 방식 자체가 달라집니다.

잊기 쉬운 행정 업무, AI에게 맡기세요

치료 일정, 병원 예약, 학교 행사, 제출 기한... 머릿속에 넣어두면 결국 한두 가지는 빠지기 마련이죠. 챗봇을 일정 관리 비서처럼 활용해 복잡한 일정을 한눈에 정리하고, 잊기 쉬운 행정 업무를 떠올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새로운 일정이 생기면 챗봇에게 그때그때 입력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이번 달 아이 관련 일정 정리해 줘”라고 하면 한눈에 보이는 표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격식 갖춘 문장, 챗봇이 대신 정리해 드립니다

기관과 공식적으로 소통할 때도 쓸 수 있습니다. 장애 자녀를 키우다 보면 행정적•제도적 문제로 국민신문고나 구청 홈페이지 등에 민원을 접수해야 하는 상황이 생깁니다. 민원 글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려면 신경도 많이 쓰이고 시간도 꽤 걸려요. AI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꼭 들어가야 할 내용과 함께 어떤 성격의 글(메일, 민원 등)을 원하는지 알려줍니다. 그러면 엄마의 의도는 살아 있으면서, 격식을 갖춘 문장이 나옵니다. 이건 엄마의 에너지를 아끼는 기술이기도 해요.

AI는 만능이 아니지만, 함께 나눌 수는 있습니다

정서적 도움도 받을 수 있습니다. 장애 자녀를 키우는 부모는 쉽게 고립됩니다. 주변에 같은 상황의 사람을 찾기 어렵고, 감정을 털어놓는 것 자체가 부담되기도 하죠. 챗봇은 반복되는 이야기도 지치지 않고 들어줍니다. 물론 인간 관계를 대체할 수는 없어요. 저 역시 처음에는 인공지능에게 감정을 털어놓는 게 낯설었지만, 최소한 감정을 정리하고 말로 풀어내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었습니다. 혼자 삼키던 불안과 죄책감을 문장으로 꺼내는 것만으로도 생각의 밀도가 달라지니까요.
AI는 만능이 아닙니다. 기술은 돌봄의 무게를 완전히 대신할 수 없어요. 하지만 엄마가 혼자 짊어지던 생각과 기억, 정리를 조금 나눠 가질 수는 있습니다. 덜 외롭고, 덜 무너지면서 오래 갈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일상은 분명히 달라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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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VI와 병원, 진단과 평가에 대한 궁금증 4가지

글 : 김지영

“다니고 있는 병원 교수님도 잘 모르던데… CVI는 진단 코드가 없나요?”
“병원에서 CVI 진단을 받으면 도움 되는 부분이 있을까요?”
“진단은 발달센터에서도 받을 수 있나요?”

Q. 발달센터에서 CVI 진단을 받았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나요?

특수교사나 재활치료사 등이 하는 것은 '진단'이 아닙니다. 진단은 의사만 할 수 있고, 그 외 전문가들은 '평가'만 가능합니다. 평가를 받았다면 부모님이 CVI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과 아이의 고유한 시각적 특성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학교나 치료실 등 기관에 공유하고, 치료와 지원 방향을 아이에 맞게 잡아주어야 합니다. 시각은 아이의 발달과 일상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조급해하지 마시고, 차근차근 공부하고 꾸준히 개입하면 느리더라도 분명한 변화가 보일 것입니다.

Q. 그럼 병원에서 CVI 진단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Korean Standard Classification of Diseases, KCD)에서는 H47.6 ‘시각피질의 장애'로 표시하고 있고, 안과에서 진단을 받을 수는 있지만 아주 제한적입니다.
CVI는 출생 후 바로 뇌 손상을 입어서 다른 장애를 동반하는 등 대부분 중증, 중복장애 아동에게서 발생하기 때문에 인지 문제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아이가 너무 어린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폐와 같은 발달장애를 동반한 경우에는 사회적 상호작용 문제와 시각 문제를 변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전문가 부족과 의료계의 무관심 또한 CVI의 진단을 어렵게 하는 원인입니다. 제하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병원의 안과에서 ‘인지가 좋아지면 보는 것도 나아질 것’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국내에서 CVI를 진단받은 사례 대다수가 뇌졸중 등의 후천적 요인으로 시각 사용은 어려워졌지만 의사소통이 가능한 노년층 또는 전맹에 가까운 이들입니다.

CVI의 진단과 평가 방법은 일반적인 시각장애와는 다릅니다. 안구 이상이 아니라 뇌의 문제임을 확인해야 하므로 해외에서는 안과 단독으로 진단하지 않고 소아신경과나 특수교사와 협업으로 진행합니다. 또한 아이에게 익숙한 환경이 결과의 정확도를 높이므로 가정 방문 평가가 권장되며, 아이의 병력, 평소 시각 사용, 행동 등 에 대한 부모의 자세한 설명도 필요합니다. 우리나라는 해외와 같이 체계적인 진단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는 않고 주로 안과에서 진단하고 있습니다.

Q. 그렇게 어렵다면 굳이 병원에서 CVI 진단을 받을 필요가 있을까요? 평가를 받은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특수학교 배치 등 교육적인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특수교육법상에서 '시각장애'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또한 복지 혜택을 위해서는 장애인복지법상 ‘시각장애인’으로 등록이 되어야 합니다. 현행 시각장애 판정 기준으로는 숫자로 나타낼 수 있는 시력 검사 결과가 필요한데, 안구 자체에 문제가 없는 CVI 아동은 시각 문제가 아닌 뇌의 기능적인 처리 문제로 보기 때문에 전맹에 가까운 경우가 아니면 인정받기가 어렵습니다. 즉, CVI 아동이 병원으로부터 진단 코드를 받지 못하면 교육과 복지 등에서 제도적 사각지대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시각 보조기기는 학교를 통해 지원받을 수 있지만 학교를 못 다니고 있거나 학교 밖에서 추가로 필요한 경우 부모가 자비로 구매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CVI 진단을 받으면 시각과 관련한 보조기기를 지원받거나 관련 기관(시각장애인 복지관, 시각장애인 학습지원센터 등)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정도는 다르지만 CVI 아동은 전맹과 달리 시기능이 조금씩 호전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낮은 단계라 하더라도 앞으로 얼마나 나아질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대비가 필요합니다. 즉, 최대한 시기능이 안 좋을 때 시각장애 진단을 받아두는 것이 유리합니다.

팁을 드리자면 소견서는 진단서보다 받기가 쉽습니다. 특수교육에서는 CVI 소견서로도 시각장애 학교에 배치가 가능하기 때문에 진단서를 받기 어렵다면 소견서라도 받으시기를 권합니다. 또한 같은 아이에 대해 어떤 의사는 아주 까다로운 기준으로 진단서를 써주지 않는 반면, 어떤 의사는 생각보다 쉽게 써주기도 합니다. 기존에 진단을 받은 아동의 사례를 참고하셔서 해당 병원을 방문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Q. CVI가 있어도 다른 눈 문제 때문에 안과 진료를 계속 봐야 할까요?

CVI는 사시, 안구진탕, 근시, 난시, 원시 등 다른 시각장애 문제와 시신경위축, 시신경발육부진, 시신경형성장애 등 다른 안과 질환을 동반할 수 있습니다. 당장은 CVI만 있다 하더라도, 시기능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하면 추후 안구 상의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지속적인 안과 진료가 필요합니다.
미국에서 CVI로 진단받은 아동은 시각장애인으로 등록되어 공적 지원을 받도록 하고 있습니다. 특수교사 양성 시에도 기본적으로 CVI에 대해 교육하고 있으며, CVI 아동은 학교에서 시각장애 학생이 받는 지원과 같은 특수교육 서비스를 받고 있습니다. 이 부분이 한국과의 가장 큰 차이인 것 같아요. 다행스럽게도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특수교육계를 중심으로 이러한 문제를 개선하려는 노력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우리 아이들을 적극 찾아내고, 지원하겠다는 것입니다. CVI 아동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볼 수 있는 기회가 열리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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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흘김일까? 아니 사시일까? 장애 영유아를 위한 소아안과

글 : 김선희
장애 진단 이후 반복적으로 관찰된 아이의 시선 행동을 계기로 시각 검진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초기 진료에서는 이상 소견이 없었으나, 추가 확인 과정에서 사시 가능성이 제기되며 대학병원 진료가 필요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장애 영유아가 전문적인 소아안과 진료에 접근하기 어려운 현실을 실감했습니다. 이 글은 특정 진단을 내리기보다, 같은 상황에 놓인 보호자들이 진료 경로를 찾는 데 참고가 되기 바랍니다.
윤이가 장애 진단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TV를 보거나 무언가에 집중해 바라볼 때, 눈을 위로 치켜뜨고 시선을 잡는 모습이 반복해서 보였습니다. 특히 빛이 있는 쪽은 정면으로 보지 않고 옆으로 흘겨보는 듯한 행동이 눈에 띄었습니다.

처음에는 ‘사시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어, 성인 진료도 함께 하는 동네 안과에 일단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진료 결과는 “괜찮다”는 말뿐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아이의 관찰된 모습이 분명했고, 무엇보다 장애가 있는 영유아의 경우 진료 환경이나 검사 협조가 어려울 수 있어 더 신중한 확인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아도 진료한다’는 안과 전문 병원을 다시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는 사시가 의심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만 장애로 인해 검사나 처치 과정에서 위험 부담이 있을 수 있다며, 대학병원급 안과로 가야 한다고 하시면서 곧바로 소견서를 작성해 주셨습니다.

그 순간이 참 암담했습니다. ‘소아를 본다’는 병원에서도 장애 영유아는 위험 부담을 이유로 충분한 진료를 받기 어려운 현실을 체감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가까운 대학병원”을 먼저 떠올리게 되었지만, 대학병원이라고 해서 모든 소아안과 진료가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가능하다면 해당 분야를 더 전문적으로 보는 교수님(소아안과 전문의)을 찾아 진료를 받고 싶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습니다. ‘소아안과 전문의가 있는 병원’ 정보를 한 번에 찾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검색을 해도 지역·진료 분야·의료진 전문 영역이 정확히 걸러지지 않았고, 각 병원 홈페이지로 들어가 의료진 소개를 일일이 확인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결국 저는 예전에 정리해 두었던 소아안과 병원 리스트를 바탕으로, 병원 홈페이지를 하나씩 확인하며 소아안과 전문의가 실제로 진료하는지를 다시 점검했고, 목록을 수정·보완하는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은 “눈흘김인지 사시인지”를 단정하기 위한 글이 아닙니다. 다만 아이가 보이는 행동이 반복될 때, 그리고 장애 영유아라는 이유로 진료의 문턱이 더 높아질 때, 부모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길을 찾아야 하는지에 대한 기록이자 공유입니다.

저와 같은 고민을 겪는 보호자분들이 조금이라도 덜 헤매시도록, 제가 확인해 정리한 소아안과 전문의 진료 가능 병원 리스트를 함께 공유해 보려 합니다. 필요한 분들께 현실적인 길잡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지역별 소아안과(또는 관련 진료) 기관 목록

원하는 지역을 클릭하시면 병원과 의료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서울 (27)
  • 가톨릭대학교서울성모병원: 신선영, 박신혜
  • 가톨릭대학교여의도성모병원: 박미라
  • 가톨릭대학교은평성모병원: 염혜리
  • 강남세브란스병원: 한진우
  • 강동경희대학교병원: 신재호, 정준규
  • 강동성심병원: 최연주
  • 강북삼성병원: 한소영
  • 건국대학교병원: 신현진
  • 경희대학교병원: 강민석
  • 고려대학교구로병원: 서영우
  • 고려대학교안암병원: 김승현
  • 공안과병원: 이종복
  • 김안과병원: 김용란, 백승희, 김대희, 황정민
  • 노원을지대학교병원: 정은혜
  • 누네안과병원(서울): 계효정, 조윤애
  • 삼성서울병원: 김상진, 박경아
  • 서울대학교병원: 주혜준, 최혁진, 우정연, 김영국, 김성준, 정재호
  • 서울아산병원: 김윤전, 문예지, 이병주
  • 서울특별시보라매병원: 정호경
  • 세브란스병원: 한재용, 한승한
  • 순천향대학교서울병원: 김현아
  • 실로암안과병원: 박혜성
  • 이대목동병원: 임기환
  • 인제대학교상계백병원: 최진
  • 중앙대학교병원: 문남주
  • 한림대학교강남성심병원: 최동규
  • 한양대학교병원: 임한웅

부산 (9)
  • 고신대학교복음병원: 김창주
  • 메리놀병원: 이지은
  • 바른눈안과의원: 임현택
  • 부산대학교병원: 최희영, 전혜신
  • 부산성모안과병원: 김선아
  • 수정안과의원: 장수경, 김사강
  • 이슬기안과의원: 이슬기
  • 인제대학교해운대백병원: 이수정
  • 인제대학교부산백병원: 문성혁

대구 (9)
  • 경북대학교병원: 천보영
  • 계명대학교 동산병원: 조순영, 장지혜
  • 계명대학교 대구동산병원: 장지혜
  • 누네안과병원(대구): 김영미, 조윤애
  • 대구가톨릭대학교병원: 김숙영, 이동훈
  • 영남대학교병원: 김원제
  • 연세제일연합안과의원: 정병진
  • 잘보는안과의원: 이정호
  • 제일안과병원: 서샘

인천 (4)
  • 가천대길병원: 백혜정
  • 가톨릭대학교인천성모병원: 임혜빈
  • 인하대병원: 강성모
  • 한길안과병원: 김철우, 김현경, 이가인

광주 (7)
  • 광주안과병원: 신지영, 문현식
  • 보라안과병원: 마양래, 이태희
  • 밝은안과21병원: 김근오
  • 신세계안과: 박영걸
  • 전남대학교병원: 허환
  • 조선대학교병원: 김대현
  • 파랑새안과: 문형진

대전 (4)
  • 건양대학교병원: 공상묵, 박혜원
  • 대전을지대학교병원: 이수나
  • 우리안과의원: 민병무
  • 충남대학교병원: 이연희

경기 (14)
  • 가톨릭대학교부천성모병원: 강남여
  • 가톨릭대학교성빈센트병원: 정연웅
  • 고려대학교안산병원: 하석규
  • 국민건강보험 일산병원: 김혜영
  • 누네안과병원(남양주): 한승한, 조윤애, 계효정
  • 분당서울대학교병원: 김동현, 양희경
  • 분당차병원: 유혜린
  • 순천향대학교부천병원: 장지호
  • 아주대학교병원: 정승아
  • 용인세브란스병원: 설동현
  • 의정부을지대학교병원: 장연지
  • 인제대학교일산백병원: 강민채
  • 일산강남성모안과의원: 이원렬
  • 중앙대학교광명병원: 오지영, 김응수
  • 한양대학교구리병원: 홍은희

강원 (4)
  • 강원대학교병원: 이주하
  • 남부밝은안과의원: 박찬
  •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나상훈
  • 한림대학교춘천성심병원: 이혜진

충북 (1)
  • 충북대학교병원: 최미영, 이성은

충남 (3)
  • 단국대학교병원: 박유연
  • 순천향대학교천안병원: 김소영
  • 세종충남대학교병원: 성재연

전북 (2)
  • 전북대학교병원: 이행진
  • 전주푸른안과의원: 유태영, 윤상원

전남 (1)
  • 더박은안과의원: 정세형

경북 (1)
  • 동국대학교경주병원: 이영춘

경남 (3)
  • 경상국립대학교병원: 조용운
  • 양산부산대학교병원: 안정효, 김수진, 양상철
  • 창원경상국립대학교병원: 김지혜

제주 (1)
  • 제주대학교병원: 장지웅

눈흘김일까? 아니 사시일까? 장애 영유아를 위한 소아안과 더 읽기"

특수학교가 당연하게 개교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글 : 김지영

특수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주민들 앞에서 무릎 꿇는 엄마들을 뉴스에서 본 적이 있다. 그게 2017년이었으니 내가 출산하기 2년 전의 일이다. 그때만 해도 그게 내 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얼마 전 나도 같은 이유로 무릎을 꿇게 되었다.

반대하는 주민, 이용하는 정치인

장애인은 취학연령이 되어도 학교에 가기가 어렵다. 거주지 주변에 특수학교가 없을 확률이 더 높기 때문이다. 도보 통학은 언감생심, 차로 30분 이내면 다행이다. 특수학교라고 아무 데나 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학교 수 자체도 적지만 그마저도 지체, 발달, 시각장애 등 장애 유형별로 나뉘기 때문에 문은 더 좁아진다.

나는 성동구에서 신혼집을 꾸리고 아이들을 낳아 키우다가 몇 년 전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 제하가 특수학교에 입학할 때가 되었는데 성동구는 물론이고 인접 지역에 지체 특수학교가 단 한 곳도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동네에 애정도 깊었고 오래 살고 싶었지만 학교 문제로 어쩔 수 없이 이사해야 했다. 기쁜 일도 슬픈 일도 많았던 나의 신혼집. 좁고 오래된 빌라에서 넓은 신축 아파트로 옮기는데도 짐이 빠져나간 텅 빈 집을 보니 쫓겨나는 듯한 기분이 들어 눈물이 핑 돌았다.
이사하고 1년이 지났을 무렵, 2029년에는 성동구에도 지체 특수학교가 개교할 거라는 소식이 들렸다. 학교 부지가 신혼집이었던 곳에서 도보 20분 거리로 자주 지나던 길목에 있었다. 제하가 다니게 되진 않겠지만 한때 우리 가족이 살았던 곳에 특수학교가 생긴다기에 기뻤는데, 역시나 반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작년 총선 때 한 후보가 이 부지에 특수학교 대신 특목고를 유치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운 것이다. 시민의식이 예전보단 높아진 건지 해당 후보는 비난 여론에 부딪혀 낙마했지만 그 뒤로도 다른 시설을 유치해달라는 민원은 계속 들어왔다.

반대는 아니지만, 여기는 아니다?

지난 6월, 교육청에서 개최한 특수학교 설립 주민 설명회를 앞두고 반대 주민들이 집회 신고를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장애 학생의 부모들이 특수학교 설립에 힘을 싣기 위해 서울 전역에서 삼삼오오 모였다. 나도 특수학교 재학생의 엄마로서, 한때 성동구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그 자리에 섰다.

명품, 게임, 패션… 글로벌 대기업의 본사가 대거 들어서고 있는 성수동은 요즘 서울에서 가장 ‘핫’한 동네일 것이다. 학교 부지 맞은편은 대규모 재건축 예정지로, 반대하는 주민 대부분이 그 땅에 집을 가지고 있는 오래된 주민이었다. 설명회장 주변에 걸린 현수막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그들의 논리는 ‘명품 동네’에는 그에 걸맞은 ‘명품 학교’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너무 그러시지들 마세요.” 설명회 시작 전 교육청에서 나온 관계자가 자리를 돌아다니며 주민들의 흥분을 가라앉혔다. 주민 설명회는 특수학교 설립 찬반을 결정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는 학교 설립은 교육청 권한으로 이미 결정되었다며, 이 자리는 설립 계획을 설명하고 지역 사회와의 연계 방안에 대해 소통하기 위한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설명회 마지막 순서인 질의응답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질문다운 질문이 나왔지만 내용이 점점 반대의견 피력으로 바뀌어가자 고성이 오가기 시작했다. 모두 서로 마이크를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마이크는 공평하게 이쪽저쪽 번갈아 가며 주어졌다.

반대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재건축 예정지로 이사 올 아이들을 생각한다면 일반 학교가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성수동을 비롯해 성동구 전체적으로 학령 인구가 줄어들면서 소규모 중고등학교의 교육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기존 학교를 통합하거나 이전하는 과정에 있다. 학령기 자녀를 둔 주민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반대하는 주민들은 수십 년도 전에 자녀를 학교에서 졸업시켰을 어르신들이었다. 그러니 일반 학교를 지으라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교육 특구’로 지정된 성동구에 어울리는 명품 특목고를 짓자는 주장도 나왔다. 하지만 특수학교 하나 없는 곳이 교육 특구라고 할 수 있을까? 특수학교는 명품 학교가 될 수 없다는 것인가?

두 번째 반대 이유는 더 좋은 곳에 지으라는 것이었다. “특수학교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여기는 아니다. 이 자리는 차량 통행이 많아 교통도 불편하고 공기도 안 좋고… 서울숲 옆에다 지어라.” 아무리 돌려 말해도 이 말의 진짜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모두가 허울 좋은 핑계일 뿐, 결국은 집값이었다. 특수학교가 들어서면 주변 집값이 떨어진다는 인식이 아직도 많다. 하지만 2016년 교육부가 전국 특수학교 주변 부동산 가격을 조사한 결과, 특수학교와 집값은 상관관계가 없었다. 오히려 주변 길을 새로 닦고 편의시설이 늘어나는 등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눈물 흘리는 부모들

마음을 찔러대는 날카로운 말들에 눈물 흘리는 사람도 많았다. 반대 주민의 발언을 들을 때마다 하고 싶은 말들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면서 가슴은 두근두근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찬성파’ 한 명이 처음으로 발언을 하자,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함성과 함께 박수를 쳤다. 장애 자녀를 둔 부모, 타구에서 소식 듣고 찾아온 특수학교 재학생 및 졸업생과 학부모, 특수학교 교장, 아무 관계 없지만 우리를 지지하러 온 사람들…

“아이고~ 많이도 왔네!” 내 자리 바로 뒷줄에서 반대를 외치던 주민들도 놀란 눈치였다. 그러면서 주민도 아닌 것들이 왜 여기 와서 난리냐고 비아냥거렸다. 애초에 지역 주민 외에 장애인 학부모와 특수학교 설립에 관심 있는 모든 사람이 참석 대상이라고 공지된 터였거니와 찬성파 중에 성수동 주민도 있었다. 재개발은 아직 멀었는데 10년 후가 될지 언제 입주할지 기약 없는 사람들을 걱정할 게 아니라, 당장 이 동네에 살고있는 내 아이가 다닐 학교가 없다고 눈물을 삼키며 이야기했다.

왜 특수학교는 지고 들어가야 할까

특수학교 설립은 이미 결정된 사안이기에 안심할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 의문이 들었다. 왜 특수학교는 일반 학교는 하지 않는 주민 설명회를 열어야 하나? 학교를 짓는데 왜 주민 의견을 들어야 하고 왜 지역사회와 상생 방안을 찾아야 하나? 특수학교 짓는 게 죄를 짓는 것도 아닌데, 왜 우리가 눈치를 봐야 하나? 지금 제하가 다니는 특수학교도 보상 명목으로 바로 옆 초등학교에 수영장을 지어줬다고 한다. 지고 들어갈 것이 아니라, 잘못된 인식과 제도부터 바꿔야 하지 않을까.
주민 설명회 두 달 뒤, 엄마들은 서울시의회에 학교 신설안 승인을 촉구하며 무릎을 꿇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반대 주민에게 묻고 싶다. 아이가 학교에 갈 권리보다 집값이 중요한지. 집값에 설사 영향을 준다 하더라도 이미 오를 대로 오른 집값에서 한두 푼 깎여 나가는 게 그렇게 아까운지. 내가, 내 가족이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장애를 겪을 일이 절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두가 늙어 죽을 때까지 자신의 두 다리로 걸어 다닐 거라는 보장은 없으며 장애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다음 세대에서 장애를 가지고 살아야 할 아이들, 그리고 그 아이를 키우게 될 부모들은 큰 고비 없이, 아주아주 당연하게 특수학교가 개교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었다.

특수학교가 당연하게 개교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더 읽기"

익숙한 공간에서의 적응과 변화

글 : 솔잎이 엄마

솔잎이가 처음 유전자 질환 진단을 받기까지 1년이 넘게 걸렸어요. 병이 바뀌기도 하고 검사를 반복하면서 마음이 참 복잡했죠. 돌 무렵부터 이상하다고 느꼈고, 복지관 수업을 알아봤지만 대기 시간이 너무 길고 수업이 없어지기도 하니까 답답했어요. 그러던 중에 지인의 추천으로 가정방문 프로그램을 신청하게 됐는데, 솔직히 저는 오히려 너무 좋다고 생각했어요.

센터는 엄마가 수업을 직접 보기가 어렵잖아요. 그런데 집에서는 선생님이 솔잎이 장난감이나 환경을 직접 보면서 알려주시니까 바로바로 적용이 되고, 저는 선생님이 어떻게 하시는지도 눈으로 보고 배울 수 있어서 정말 좋았어요.

아이와 진정한 소통으로 연결되는 시간

선생님이 오실 때마다 솔잎이는 정말 좋아했어요. 말은 못하지만 “음~” 하면서 계속 얘기하듯 소리를 내고, 선생님만 보면 밝아지는 모습이 신기했죠. 시각장애 때문에 처음엔 아이가 보는 건지조차 몰랐는데, 선생님이 CVI라는 걸 알려주시면서 그에 맞는 놀이를 해주신 게 정말 도움이 됐어요. 집에서도 그 방식대로 반복하다 보니 솔잎이의 반응도 조금씩 달라졌고, 유대감도 깊어졌어요.
특히 ‘선택하게 하기’ 같은 활동은 예전엔 오래 걸렸는데, 지금은 확실히 손으로 ‘이거!’ 하고 잡아요. 자기가 뭘 원하는지를 알고, 표현도 할 수 있게 된 거죠. 이게 가장 큰 변화라고 생각해요.

가족 모두에게 열린 수업

저도 직장을 다니다 보니 수업에 참여 못 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그럴 땐 아빠나 할머니, 시터 이모가 함께했고, 저는 들은 내용을 다시 가족에게 전달했죠. 그러면서 가족 모두가 솔잎이 발달에 대해 더 알게 되고, 같이 고민하게 됐어요.

예전엔 어떤 장난감을 줘도 반응이 없으니까 그냥 방치되던 순간도 있었을 텐데, 지금은 ‘아, 이렇게 놀면 되겠구나’ 하고 접근하니까 모두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더라고요. 선생님 오신다고 하면 온 가족이 기다리고, 수업이 끝나면 “이번엔 뭘 배웠어?” 하고 서로 이야기하는 시간이 생겼어요.

정확한 정보의 유무가 좌우하는 것

솔잎이 병은 너무 희귀해서 환우회도 없고, 의사 선생님들도 잘 모르시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저는 미국 환우회에 연결해서 정보를 얻기도 했고, 하상복지관 단톡방에서 정부지원 프로그램이나 유용한 정보를 많이 얻었어요.

그런데 이 모든 건 제가 발품 팔고 귀동냥해서 얻은 거예요. 조기개입 프로그램도 복지관에서 추천 안 해줬다면 몰랐을 거고요. 그래서 이 프로그램이 더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특히 엄마들이 아이를 돌보며 무엇을 해야 할지 플랜을 짤 수 있도록, 체계적이고 단계적인 정보가 제공되면 정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무엇보다 조기개입 선생님이 우리 집에 오신 건, 저희에겐 정말 큰 행운이에요. 엄마가 외롭지 않고 의논할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몰라요.

익숙한 공간에서의 적응과 변화 더 읽기"

기다림을 배우는 시간, 함께 크는 기쁨

글 : 물결이 엄마

처음엔 학습지처럼 공부를 가르쳐주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집에 선생님이 오신다니까, 당연히 책이나 연필 챙겨야 하나 싶었죠. 근데 막상 시작해보니 상담처럼 진행되더라고요. 아이한테 무언가를 억지로 시키는 게 아니라, 저와 아이를 이해하려는 분위기였어요. 물결이가 공부를 워낙 싫어하거든요. 억지로 뭘 시키면 도망가고, 강압적인 분위기도 싫어하고요. 그래서 오히려 이 방식이 결이한테는 더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저도 덜 부담스럽고요.

아이의 언어와 정서적 변화

물결이는 폐렴을 앓고 난 뒤로 외부 사람을 무서워했어요. 선생님도 피하고, 나가는 것도 무서워하고요. 처음 몇 주는 물결이가 아침마다 일어나질 못해서 선생님이랑 얼굴도 못 보고, 저랑만 계속 이야기 나눴어요. 그런데 조금씩 변하더라고요. 기다리는 연습도 하고, 좋아하는 장난감을 챙겨 오시면 그걸 집에서 스스로 가지고 놀았어요.

무엇보다 언어 표현이 다양해졌어요. “이건 젤리 같아”, “솜사탕 같아” 하며 비유도 하고요. 날짜나 시간도 종종 이야기해요. “몇 시에 할 거야” 하고 계획도 세우고요. 선생님이 안 오시면 “왜 안 와?” 하고 묻고, 전에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을 기억해서 “그건 선생님한테 물어보자” 하기도 해요.

엄마도 변했다

물결이는 옷 입는 걸 극도로 싫어해요. 감기에 걸려도 안 입으려고 하니, 저도 자주 화를 냈죠. 그런데 선생님이 기다려주라고 하셔서, 요즘은 그냥 놔둬요. 자기가 추울 때까지 기다리면, 언젠가는 “엄마 나 옷 입을래” 하더라고요. 병원에서 짜증 낼 때도 예전엔 소리 지르고 혼냈는데, 이제는 왜 그런지 살펴보고 대처하려 해요. 이런 변화가 제일 커요.

처음에는 화부터 내고,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는데, 이젠 조금 더 아이를 지켜보고 기다릴 수 있게 됐어요. 민결이도 전보다 훨씬 더 저에게 “도와줘”, “안아줘” 하면서 표현을 많이 해요. 예전엔 손길 닿는 것도 싫어하던 아이가 이렇게 변하니까, 저도 마음이 많이 녹아요.

집에서의 개입, 더 자연스럽게 다가왔어요

센터에서 치료를 받을 땐, 끝나고 10분 정도만 상담할 수 있었어요. 근데 가정방문은 궁금한 게 생기면 바로 물어볼 수 있고, 물결이도 집에서는 거부감이 훨씬 적어요. 시간은 조금 아쉬웠어요. 기간이 짧기도 했고, 너무 이른 아침이라 아이가 잠든 상태일 때도 있었거든요. 그래도 전체적으로 보면, 아이에게 맞춰서 접근해 주시고, 제가 모르는 부분도 잘 설명해 주셔서 많은 도움이 됐어요.

이런 프로그램을 주변에도 꼭 추천하고 싶어요. 아이의 특성이나 기질에 맞춰서 도와주니까, 그게 제일 좋았던 것 같아요. 사실 저도 이런 게 있다는 걸 몰라서 늦게 알게 된 게 제일 아쉬워요.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더 많은 걸 시도해볼 수 있었을 텐데요. 그래도 지금이라도 이렇게 변화를 겪고 있다는 게 참 감사해요. 저도, 물결이도 함께 배우고 자라고 있는 중이에요.

기다림을 배우는 시간, 함께 크는 기쁨 더 읽기"

아이와 함께하는 삶을 배워가는 중입니다

글 : 여울이 아버지

처음엔 막막했습니다. 아이가 또래보다 느리다는 말을 듣고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지만, 나이가 어리다 보니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이야기만 들었어요. 아무리 상태가 안 좋다 해도, 부모로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죠. 그러다 재활의학과 의사선생님을 통해 조기개입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부모가 개입해야 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어요. 그 길로 가정방문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부모가 해야 한다는 건 몰랐어요

처음엔 선생님이 아이를 직접 치료해 주시는 줄 알았어요. 몇 번만 받으면 좋아질 거라고 단순하게 생각했죠. 그런데 선생님은 아이보다 저희를 먼저 보셨어요. 우리가 아이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어떤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지 하나하나 코칭해 주셨어요. 그때는 좀 어색했지만, 나중에 돌아보니 그게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었더라고요.

조기개입을 시작하고 한두 달 지나니까 아이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어요. 눈을 마주치고, 부르면 돌아보고, 자기 의사를 표현하려고 하고. 예전엔 외출도 어려웠는데, 이제는 같이 식당도 가고, 여행도 갈 수 있게 됐습니다. 그게 다 아이의 행동만 바뀌어서가 아니라, 저희가 아이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기 때문이에요.

하루 24시간, 아이와 함께 눈높이를 맞추는 연습

가정방문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나요. "지금 아이에게는 눈높이를 낮추고, 즉각적으로 반응해 주는 게 가장 큰 교육입니다." 그 말을 듣고 나서부터는 아이의 표정, 몸짓, 소리에 더 귀를 기울였어요. “물 줘”, “불 꺼줘” 같은 말에도 바로바로 반응하려고 했고, 아이가 뭘 표현하려고 할 때마다 최대한 도와주려 했어요.

식당에서도 연습했어요. 예전에는 아이가 뺏는 줄 알고 울었는데, “아빠 차례야, 하나 둘 셋” 하고 바로 돌려주는 걸 반복했어요. 그렇게 조금씩 나눔도 배우고, 기다리는 것도 배우더라고요. 씻기, 옷 입기, 인사하기 같은 사소한 일상도 기회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일부러 더 일찍 일어나 아이와 옷 입기 연습을 하고, 숟가락 쥐는 것도 같이 해 봤죠. 그 시간이 결국 아이를 키우는 시간이었어요.

아이는 달라졌고, 나도 변했습니다

처음엔 자신감보다는 혼란이 컸어요. 그런데 아이를 이해하게 되고, 함께 살아가는 삶을 조금씩 배워가면서 내가 이 아이의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지금도 모든 게 잘 풀리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아이를 이해하고 함께 갈 수 있는 힘은 생긴 것 같아요.

그리고 조기개입을 하며 한 가지 더 크게 바뀐 게 있어요. 세상을 보는 눈이에요. 예전엔 ‘장애’ 하면 그냥 불쌍하다, 안타깝다 생각했어요. 그런데 직접 겪어보니 이건 전혀 다른 세계였어요. 그리고 그 안에서 묵묵히 애써주시는 선생님들을 보면서 많이 위로받고, 힘도 얻었어요. 내가 낳은 아이도 감당이 안 돼서 힘든데, 남의 아이를 위해 애쓰는 분들이 있다는 게 정말 큰 울림이었죠.

부모가 키우는 만큼, 부모를 도와주는 제도가 필요합니다

결국에는 부모가 아이를 키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조기개입도 결국 부모가 아이와의 관계 속에서 배워나가는 거고요.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과 경제적인 여유가 필요해요. 맞벌이 부부가 자폐 아이를 24시간 돌보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잖아요. 그래서 이건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국가가 책임져야 할 문제라고 생각해요. 재정적인 지원도, 믿고 접근할 수 있는 공공기관도 훨씬 더 많아져야 하고요.

지금도 언어치료나 감각통합치료를 받고 있지만, 여전히 병원과 일상이 단절돼 있는 느낌이 들어요. 치료가 실생활과 연결되지 않으면 결국 큰 도움이 되지 않잖아요. 그래서 가정방문처럼, 아이의 일상을 중심에 둔 개입이 훨씬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아이와 함께하는 삶을 배워가는 중입니다 더 읽기"

병원을 전전하던 시간에서 일상으로 돌아오기

글 : 바다 어머니

바다가 만 한 살쯤 되었을 때였어요. 병원에서 작업치료를 받던 중, 치료사 선생님이 '가정에서 받는 조기개입 프로그램이 있다'고 소개해주셨어요. 그 전엔 그런 서비스가 있다는 것조차 몰랐거든요. 처음엔 온라인으로, 나중엔 선생님이 집으로 직접 오셔서 아이를 봐주셨어요. 놀라웠던 건 치료만이 아니라, 집 환경 하나하나를 보시고 조언을 주셨다는 거예요. 장난감 위치, 의자에 앉는 자세, 식탁에서의 동선까지… 센터나 병원에서는 받을 수 없는 세심한 조언들이었어요.
저는 이 프로그램이 너무 좋아서, 이 서비스를 계속 받기 위해 이사까지 했어요. 다른 곳에서는 받을 수 없다는 게 아쉬웠지만, 그만큼 간절했던 것 같아요.

치료에서 놀이로, 걱정에서 신뢰로

사실 초반에는 하루라도 더, 누군가 아이를 더 많이 만져주면 좋아질 거라는 마음뿐이었어요. 그런데 가정방문은 그런 ‘치료’의 개념이 아니었어요. 아이 손가락이 잘 안 움직였을 때, 선생님이 과자를 뿌려놓고 주워보게 하라고 하셨어요. 그랬더니 놀랍게도 아이가 처음으로 엄지와 검지를 써서 집더라고요. 놀이를 통해 아이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자연스럽게 따라하게 되었어요.

제가 아이에게 무심코 던지던 말들도 돌아보게 되었어요. “이 책 읽자” 대신 “이 책이 좋아, 저 책이 좋아?”라고 물어보는 것만으로도 아이가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어요. 이런 작은 변화들이 아이의 주도성을 키워줬고, 저 역시 아이의 잘하는 점을 더 많이 보게 되었어요.

아이의 행복, 나의 행복

예전에는 치료에 대한 조급함, 불안함이 너무 컸어요.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에 밤마다 괴롭기도 했고요. 그런데 조기개입 선생님과의 대화를 통해 기준이 바뀌었어요. ‘남들처럼 걷게 하자’가 아니라, ‘이 아이가 행복하게 살아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를 생각하게 된 거예요. 그렇게 생각이 달라지니, 제 마음도 훨씬 편해졌고, 바다도 더 밝아졌어요.

무엇보다 집에서 남편과 함께 선생님 조언을 들으면서 아이를 함께 돌보게 된 것도 큰 변화였어요. 예전엔 제가 혼자 다 떠맡았는데, 이젠 우리 둘 다 아이를 잘 이해하고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안정감이 생겼어요.

더 많은 부모님들이 알았으면

조기개입을 받으면서 가장 크게 느꼈던 건, 정보가 정말 생명이구나 하는 거였어요. 아이가 조금 느리다는 걸 느꼈을 때, 어디에 가야 하는지도 몰랐고, 병원에서도 몇 마디로 단정 지어버리니 너무 막막했어요. 그래서 육아 카페에서 검색하고, 엄마들 후기를 보고, 그렇게 하나하나 찾아가야 했어요. 지금도 많은 부모님들이 그럴 거예요.

그래서 이런 서비스가 있다는 걸 더 많은 사람이 알 수 있게 홍보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특히 지금처럼 특정 지역에만 있는 게 아니라, 전국 어디서나 받을 수 있도록요. 무엇보다, 아이를 잘 키운다는 건 결국 부모가 잘 알고 있어야 가능한 일인 것 같아요. 그 첫 걸음을 도와주는 게 바로 조기개입 프로그램이었어요. 저는 너무 늦기 전에 이 정보를 더 많은 부모님이 알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병원을 전전하던 시간에서 일상으로 돌아오기 더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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