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련 후, 다시 일상으로

글 : 김지영

제하의 경련으로 새벽에 일어나서인지 점심시간 전인데도 하루가 다 간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늦었지만 이제 첫째를 유치원에 보내야 했다. 응급실에 동행한 탓에 피곤해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 같아서는 집에서 쉬게 하고 싶었지만 해야 할 일이 있어 어쩔 수 없었다. 세수를 시키는데 아빠랑 씻던 게 생각났는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옷을 입다가도 울었다. 아이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내 손에 이끌려 꾸역꾸역 걸었다. “집에 가면 아빠랑 제하 없으니까 신나지 않아.” 아이가 울먹이면서 말했다.
유치원이 가까워질수록 왁자지껄한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마침 바깥놀이 시간인지 같은 반 친구들이 유치원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친구들도 우리를 발견하고 큰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우르르 달려와 아이를 에워쌌다. 한 친구가 우리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너무나 해맑은 표정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리 속에 섞여 놀이터로 향하는 첫째. “엄마한테 인사해야지~” 선생님의 말씀에 그제야 하는 둥 마는 둥 “엄마 안녕!”하고 인사한다. 너는 너의 세상에서 나름대로 잘 지내고 있구나, 마음이 놓였다.

퇴원시켜 주세요

다시 집으로 가면서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제하는 그 사이 응급실에서 나와 일반 병동으로 이동한 상황이었다. 서둘러 입원 짐을 싸서 병원으로 갔다. 도착해서 보니 제하의 의식이 완벽하진 않지만 아까보다는 돌아와 있었다. 웃기면 살짝 웃어주는 정도. 이름만 불러도 활짝활짝 잘 웃는 아이라 우리 부부는 웃음의 유무나 크기로 제하의 컨디션을 파악한다. 어딘가 아프거나 기분이 좋지 않으면 웃지 않거나 대충 웃어서 알아차리기가 쉽다.
남편을 회사로 보내고 내가 보호자로 들어갔다. 전공의 파업의 영향인지 병실은 제하를 포함해 단 두 명뿐이었다. 같은 병동 내 다른 병실도 비슷했다. 병실이 꽉 찼을 때도 답답했지만 텅 빈 병실은 또 이것대로 숨이 막혔다. 이틀이든 석 달이든 입원은 정말 힘들다. 커튼으로 사방이 둘러싸인 작은 공간에 몇 시간 있다 보면 없던 폐소공포증까지 생길 것 같다. 한밤중에 석션이나 네블라이저를 하게 되면 사람들의 눈치가 보이고, 반대로 자야 할 시간에 누군가 큰 소리로 동영상을 보거나 대화를 하면 신경이 곤두선다.
제하의 의식이 완전히 돌아올 때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하루를 꼬박 굶기고 컨디션을 확인하며 조금씩 먹이기 시작했다. 일단 먹이기 시작하니 토하지 않고 소화도 잘 해서 굳이 병원에 더 있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예전 같으면 의사의 퇴원 지시를 마냥 기다렸겠지만, 그런 식으로 병실에서 무의미한 시간을 보냈던 숱한 과거의 경험들이 떠올랐다. 제하의 상태를 간호사실에 먼저 이야기하고 퇴원하고 싶다고 했고 잠시 후 퇴원 오더가 떨어졌다. 남편이 데리러 올 때까지는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할 것 같고 짐도 그리 많지 않아서 그냥 장애인콜택시를 불러 퇴원했다. 예전엔 입원과 퇴원 자체가 아주아주 큰일처럼 느껴져서 남편 연차 쓰게 하고 난리법석을 떨었는데 몇 번 겪고 나니 혼자서도 할 수 있게 되었다.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

일찍 귀가한 남편에게 제하를 맡기고 유치원에 있는 첫째를 데리러 갔다. 평소 첫째가 하원하면 집에 가기에 바빴지만, 오늘만큼은 바로 귀가하지 않고 놀이터에서 한참을 놀게 해줬다. 마트 구경 갔다가 호기롭게 외식도 하고 아이가 졸라야만 사주었던 아이스크림도 선뜻 사주었다. 하원길이 이렇게 여유로운 것이었구나. 돌봄 선생님 퇴근 시간이 다가오는 걸 보고 종종걸음치며 아이를 채근하지 않아도 되고, 아이가 밖에서 더 놀다 가고 싶다고 떼쓰면 10분쯤은 더 기다려줄 수 있구나. 일반적인 가정의 아이들은 이렇게 지내겠구나. 이런 생각하는 나를 보며 제하에겐 죄책감을, 일상을 맘껏 누리지 못하는 제하 형에게는 안쓰러움을 느꼈다.
“어제 놀라기도 하고 마음이 힘들었지? 그래도 좋은 일도 많이 있었잖아.” 여기까지 말했을 뿐인데 아이가 줄줄 읊기 시작했다. “응! 구급차도 타보고, 초코빵도 먹고 소시지도 두 개나 사고~ 놀이터도 가고 회전초밥도 먹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와~ 좋은 일도 많았다!”, “그치~ 제욱이 유치원에서 인기도 많더라? 살다 보면 좋은 일도, 안 좋은 일도 생겨. 안 좋은 일이 있을 땐 오늘처럼 좋은 일을 많이 집어넣으면 돼. 그럼 기분이 좋아져.” 나에게 하는 말인지, 아이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그런 말을 했다.
“구급대원 어땠어? 멋있었지? 엄마가 정신없어서 구급차에서 내릴 때 인사도 못했네.” 소방서가 집 바로 옆이니 내일은 구급대원 아저씨들한테 인사하러 가자고 아이와 약속했다. 특별히 좋은 일이 없어도 괜찮다. 우린 그저 아무 일 없는 일상의 소중함을 온몸으로, 알알이 느끼면서 그렇게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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