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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우울 해방일지 – 심리상담부터 정신과 약 복용까지

글 : 김지영

아이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아이는, 우리 가족은, 나는 어떻게 살지? 질문에 답을 내리거나 뭔가 대책을 세우기도 전에 전쟁 같은 일상이 펼쳐졌다. 몸으로는 지금 할 일을 하면서 머리로는 그다음에 해야 할 일만을 생각했기에 다른 것이 비집고 들어올 여유가 없었다. 이런 날이 어쩌다 하루 이틀 있는 게 아니라 매일 계속되는데 정신적으로 아무 문제없이 살 수 있을 리가 없다. 심리상담과 정신과 약물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받으면서 조금씩 나아진 내 정신적 여정을 풀어보려 한다.

정신 줄이 끊어지니 화살이 가족에게 날아갔다

'쌍둥이', ‘이른둥이’, ‘초저체중아’라는 타이틀로 신생아중환자실에 입원 중이던 제하가 갑작스러운 괴사성장염으로 첫 수술을 받을 때 남편과 나는 두 손을 꼭 잡고 어떻게든 잘 키워보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데 다음날, 주치의는 아이가 수술받을 때 혈압이 떨어져 뇌 손상을 입은 것이 확인됐다고 했다. 의사가 보여준 화면 속 제하의 뇌는 녹아내린 듯 대부분 검게 보였다. 말을 못할 수도, 걷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 잘 키워보자는 다짐은커녕 머릿속에서 뭔가 툭 하고 끊겼다.
제하가 퇴원해 집으로 온 뒤부터는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가장 힘든 것은 두 아이가 동시에 울 때였다. 나중에는 혼자서도 둘을 달랠 수 있었지만, 요령이 생기기 전까지는 매 순간 갈등이 일었다. 누구를 먼저 안아줘야 하나? 마이클 샌델의 에 나오는 질문들처럼, 어느 쪽을 선택해도 마음이 아픈 문제였다. 그리고 제하에게는 미안하지만 늘 첫째를 먼저 안고 방으로 들어갔다. 제하의 울음소리는 애써 안 들리는 척해봤지만 온몸으로 죄책감을 느꼈다. 첫째를 재빨리 재우고 거실로 나오면 제하는 울다 지쳐 훌쩍이고 있거나 혼자 잠들어 있었다. 제하가 아주 작은 소리에도 잠에서 깨는 탓에 숨소리를 숨기는 것이 버릇이 되어 늘 숨이 찼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면 거의 5분 단위로 시계를 쳐다봤고 남편이 퇴근하면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말 그대로 손발을 총동원해서 두 아이를 달래던 시절
웬만하면 힘들다는 소리를 안 하는 성격이기도 했고 그래도 이 정도면 나름 씩씩하게 잘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칭찬했는데, 양육 스트레스 검사나 각종 심리검사 결과는 ‘고위험군’이었다. 너무 바빠서 내 감정을 제대로 느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었다. 힘들어도 견딜만하다고 착각하는 동안 내 스트레스는 가족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남편을 비난하고, 아이가 말귀를 알아들을 때쯤부터는 아이에게도 상처 주는 말을 쏟아냈다.

진입 장벽이 낮은 심리상담으로 시작해 보자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복지관에서 장애인 부모를 대상으로 하는 심리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무료에다 제하가 치료받는 동안 상담을 받을 수 있어서 따로 시간을 내지 않아도 되는 것이 장점이었다. 첫 상담에서 선생님은 나에게 서약서를 내밀었다. 상담 기간에는 자살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있었다. 자살을 생각할 정도는 아닌데, 여기서 상담받는 나는 그렇게 심각한 상태구나 다시 한번 느낀 순간이었다.
본격적인 상담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 가족의 기질, 성격유형 검사를 먼저 받았다. 일단 나와 배우자가 어떤 기질이고 어떤 성격인지 아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많은 것이 이해가 되었다. 우리 부부에게 공통점도 있지만 애초에 많은 부분에서 서로 다른 사람이구나. 다정한 우리 남편이 왜 아이의 치료에는 관심이 없는지, 아이 체중 늘리는 것을 나만큼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지, 이런 나를 부정적이라 여기는 남편을 보며 나만 큰일 났고 나만 발을 동동 구르는 것 같아 외로울 정도였는데 그동안의 갈등이 헛웃음이 날 정도로 부질없게 느껴졌다.
기질, 성격 유형 검사지
상담사의 스타일이 나와 맞지 않으면 상담이 도움은커녕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데 나는 다행히 좋은 선생님을 만났다.
반대로 상담을 받는 사람도 마음을 충분히 열어야 한다. 어떻게 나오나 보자는 식으로 상담사를 대하거나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는 데에 거부감이 있다면 상담이 좋은 방향으로 진행되기 어렵다.
장애인 부모 상담이니까 아이 때문에 느끼는 감정에 관해서만 이야기할 줄 알았는데 선생님은 나의 어린 시절부터 부모, 배우자 등 모든 이야기를 끄집어내도록 했다. 일단은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 마음속 응어리가 상당히 풀렸다. 선생님은 이야기를 진득이 듣고 공감하는 한편 현실적인 대안도 제시해 주었다. 귀가하면 남편과 상담 내용을 가지고 대화도 하고, 선생님의 조언대로 일주일에 한 번은 혼자 밖에 나가 외식을 하기도 했다. 상담은 일주일에 한 번 1시간, 30회기로 진행되었고 부족하면 추가로 받을 수 있었는데 나는 마음에 안정을 찾은 상태로 딱 30회 되던 날 상담을 종료했다.

상담으로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은 약의 도움을 받아보자

그렇게 괜찮아졌나 싶었는데 상담으로 커버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욱’하고 순간적으로 올라오는 감정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마침 미운 네 살에 접어든, 말은 하지만 말을 듣지는 않는 첫째에게 가장 심하게 나타났다. ‘이건 고작 네 살짜리에게 가혹한 거 아닌가’ 생각하면서도, 말을 하는 와중에도 후회가 일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다시 상담을 받는다고 달라질까? 발작적으로 일어나는 화는 상담만으로 다스리기 어려울 것 같았다. 병원에 갈 용기가 나지 않아 고민하던 차에 생각보다 주변에 정신과 약을 먹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희로애락의 감정이 아예 없어지는 건 아닌지, 잠에 취하거나 축축 처지는 건 아닌지, 살이 찌는 건 아닌지 등 부작용이 가장 걱정이었는데 약을 먹어본 경력자(?)들은 요즘은 약이 좋아서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처음으로 찾아간 정신건강의학과에서는 의사를 만나기 전에 먼저 우울증과 불안의 정도를 체크하는 자가 보고식 설문지를 작성하고 스트레스 검사를 받았다. 손목과 발목에 센서를 붙이고 5분 정도 앉아 있었는데 이걸로 정말 스트레스 검사가 되는 건지 처음에는 의심이 되었다. 이 검사의 원래 명칭은 '자율신경계 검사(HRV, Heart rate variability)’로,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의 균형을 파악해 스트레스 정도를 평가하는 것이다. 스트레스가 정신 질환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현재 몸이 스트레스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등을 파악할 수 있어서 진단의 보조 자료가 된다고 한다.
설문 결과도, HRV 검사 결과도 좋지 않았다. 의사는 검사 결과를 확인하고 내 이야기를 듣더니 충분히 약을 먹을 만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약 복용에 대해 이렇게 덧붙였다. ‘마음이 그릇이라고 치면, 그릇에 가득 찬 물은 스트레스다. 햇볕을 쫴서 물을 증발시키거나 그릇을 기울여서 물을 좀 흘려보내야 하는데 나의 문제는 물이 줄어들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제하의 장애) 물을 쏟아내기도 어려워서(스트레스 해소) 그릇 자체의 크기를 키워야 한다. 약이 그 역할을 해줄 것이다.’ 나는 의사에게 의존도가 적은 약을 처방해 달라고 부탁해 최소 용량으로 복용을 시작했다. 이후 2주에 한 번 병원에 방문하면서 약효가 있는지, 부작용은 없는지 등 경과를 살폈다.
비상용으로 남겨둔 약
약을 먹으면서 확실히 화가 덜 났다. 거의 안 났다. 아이가 미운 행동을 해도 ‘아이니까’ 하고, 화내기 전에 객관적으로 상황 판단을 먼저 할 수 있었다. 노오력이 부족하다고 스스로를 벼랑 끝까지 몰아세우는 생각도, 모든 게 나때문이라는 죄책감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이만하면 충분히 할 만큼 하고 있다는 만족감마저 들었다. 그렇게 3개월 동안 약을 먹고 의사와 상의 후 2주 치 비상약만 남긴 채 복용을 중단했다. 고민만 하지 말고 좀 더 일찍 먹었다면 아이와 남편에게 험한 꼴 덜 보였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네가 상담을 왜 받아?’, ‘정신과는 정신병 걸린 사람이나 가는 곳 아니야?’ 옛날 같으면 이런 시선이 있었겠지만 다행이라 해야 할지, 요즘은 흔한 일이 된 것 같다. 아이가 사춘기에 비뚤어지는 것처럼, 어른이 갱년기 때 감정이 널뛰는 것처럼 감정에는 호르몬도 관여하기 때문에 내가 노력으로 조절할 수 없는 영역이 분명히 있다. 몸이 아플 때 진료를 받고 약을 먹는 것처럼, 마음이 아플 때도 상담을 받고 필요하다면 약을 먹는 것도 고려해 보자. 조금만 용기 내면 내 그릇이 스트레스로 넘치기 전에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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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것 같은데 보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 같은데 보는 아이

글 : 윤승아

집안을 잘 돌아다니지만 가슴높이의 책상을 보지 못하고 정면으로 들이받고, 엄마가 평소 잘 앉지 않는 거실 쇼파에 있으면 엄마를 찾아 거실을 왔다갔다 하면서도 엄마를 찾지 못합니다. 계단의 깊이와 높이를 구별하지 못하며, 감각으로 올라가도 계단의 시작부분과 끝 부분을 인식하지 못하고 발을 헛딛으며, 엄마를 알아보지 못하고 목소리와 느낌으로 구별합니다.
바로 뇌손상으로 인해 시지각의 어려움을 가진 “피질 시각장애(Cortical Visual Impairment), 최근에는 뇌성시각장애(Cerebral Visual Impairment)”라고 불리는 아이들입니다.
하지만 이와같은 시지각의 어려움은 대부분 전문가들도 잘 알지 못하며 피질시각장애에 대해 알고 있어도 단편적으로 알고 있고 상세하게 알고 있는 전문가가 드물며 개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몰라 적극적인 진단이나 중재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다른 장애의 시지각 문제와 같이 지적 영역으로 취급되고 시각장애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눈에 문제가 없어도 못 보던 아이

지민이는 소리가 나지 않는 장난감을 쳐다보거나 손을 뻗어 잡지 않고 눈맞춤도 안되고 깜짝반사도 전혀 되지 않아 걱정이 많이 되었습니다. 아직은 어려서 알 수 없다고 하고 누구도 명확하게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이는 이미 뇌손상으로 인해 뇌성마비, 지적장애, 영아연축등 엄청난 일을 격고 있는 중이라 불명확한 상태로 만1세가 되었습니다.
만1세무렵 "미숙아 망막증 Follow-up진료에서 망막의 시신경은 잘 자랐지만 시각을 사용하는 반응이 거의 없다. 깜짝반사가 안나오며 이시기는 고개를 많이 들고 있어야 하는데 시각에 문제가 있는 아이들처럼 대부분의 시간을 고개를 숙이고 있어 시각적 예후가 매우 안좋을 것 같다"는 소견을 들었습니다.
이후 시유발검사, 다른 소아 안과를 찾아다녀 봤지만 “안구의 문제가 아니다 뇌의 문제이므로 뇌가 좋아지면 좋좋아질거다.특별히 할 수 있는 것은 없으며 뇌가 좋아져야 좋아지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하고 있는 재활치료 열심히 받아라. 자라면서 좋아질 수도 있고 안좋아질 수도 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저는 만나는 전문가마다 아이 상황을 알렸고 그 중 한 치료사가 시각문제에 관심이 있는 작업치료사를 소개해주셨고 그분이 Dr. Roman-Lanzzy의 책을 공부하며 여러 시각적 중재를 해주었습니다. 그러다 만 3세를 며칠 앞두고 아이가 햇빛에 비치는 환타병을 잡으러 가는 것을 보는 순간 피질시각장애란 것이 어떤것인지 몰랐던 저는 “아 이제 보는구나"라고 생각했고 시각적 작극을 주시던 치료사도 거의 회복되었다는 의견에 다른 재활과 뇌전증 치료에 몰두했습니다.
햇빛에 반짝이는 환타병을 보고 잡으러 가던 날
하지만 아이는 보는 아이다 싶으면 확연하게 보이는 큰 사물도 보지 못하고 안보는건가 싶으면 작은거도 손으로 집었습니다. 굉장히 여유있는 폭의 복도를 마치 비좁은 길을 가는것처럼 지나가지 못하며 쩔쩔매기도 하고 블럭이나 장난감을 선반위에 아슬아슬하게 정리해 놓기도 했습니다. 계단을 혼자 못올라갈 이유가 없는 신체상태가 되었어도 계단이나 장애물을 잘 인식하지 못했고 신체적으로는 문제가 없는데 보행시 흔들림이 많았고 이는 야외에선 더 심했습니다. 이러한 불안감으로 무릎을 구부려 안정성을 얻는 방식으로 걸었습니다.

진단과 조기개입이 안되어 허비한 시간. 10년!

초등학교 2학년 최진희 박사님의 피질시각에 대한 강의를 들으며 CVI아동의 행동적 시기능적 특징을 듣는데 그냥 딱, 모든 것이 지민이였습니다. 그동안 이해가 안되던 부분이 모두 설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아이의 상황을 모르고 했던 거의 학대에 가까웠던 시행착오가 주마등처럼 머리속을 스쳐갔고 가슴이 미어져, 강의를 듣는 내내 울음을 삼키며 들어야 했습니다.
이후 6개월에 한 번씩 평가 받고 모르는 것이 생길 때마다 들고 쫓아가 여쭤보며 아이가 좀 더 잘 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아이의 CVI특성에 맞는 중재를 시작하자 아이는 눈을 더 의미있게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하지 못하던 것을 하게 되고 운동이나 인지적인 측면에서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또한 저는 그동안 아이의 특성을 몰라 아이를 힘들게 하고 피곤하게 하는 것들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고 그로인해 뇌전증도 좀더 조절되고 의미있는 시간들을 아이에게 줄 수 있었습니다.
지민이는 지적장애와 뇌병변장애가 있고 그로인해 많은 것이 부족하지만 피질피질시각장애를 고려한 시각적중재활동이 지민이의 재활 프로그램에서 최우선과제가 되었습니다.

전문가의 부재 - CVI 시각 전문 특수교사가 없다.

하지만 구체적인 방법에선 전문가와 현 치료사들의 인식 및 교육 부족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지민이의 시각적인 어려움(피질시각장애)을 이해시키기 어려웠고 시각적중재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함께 해주시려했던 전문가분들도 기존 다른아이들의 치료와 본인 업무시간 등으로 공부하고 적용할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어려웠고, 그나마 있는 자료도 아직 번역되지 않은 외국 자료들 뿐이라 접근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비로소 아이의 특성을 이해하게 되었지만 적절한 개입과 중재를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학령기가 되어 특수교육지원대상자가 되었지만 시각적 어려움은 시각장애로 등록이 되었거나 특수교육법상 시각장애로 진단배치가 되어야 지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담당 특수반 교사와 같이 공부하며 개별화계획 수립에 포함시켜 시도들을 해보는 방법 밖에 없었고. 업무가 과중함에도 여러 시도를 해주셨던 특수교사 선생님과 시설물 설치와 지원 인력을 허락해주셨던 교장선생님과 교직원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드립니다.
초등학교 2학년때 CVI를 알고 처음 학교 사물함 환경 중재를 한 것

보지 못하지만 시각장애로 등록할 수 없는 현실

시각장애로의 등록은 우리아이들의 시각장애를 지적영역으로 평가하고 이중평가를 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거부당해야 했습니다. 특수교육법상 시각장애로 배치되기 위해서는 시력이나 시야의 검사가 해당되지 않거나 검사가 불가능한 대부분의 경우에는 진단할 전문가가 없고 어렵다는 이유로 거부되어 부모가 증명해야하는 상황입니다. 시각 특수교육이 필요하고 이를 통해 시기능과 일상생활 및 학습에서 개선이 될 수 있음에도 전문가와 정부기관의 무지로 발달에 중요한 시기에 필요한 교육과 복지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장애를 모르는 것, 외면하는 것

장애아를 키우며 받은 불평등과 불합리는 인식의 부재가 컸습니다. 잘 모르기 때문에 어떻게 대해야할지 당황하고 불편해합니다. 저역시 지민이를 키우기 전엔 그랬구요. 이해시키고 설명하고 같이 생활하며 경험하면 훨씬 더 다른 태도(불편해하거나 어려워하지 않는)가 됩니다. 때문에 장애인식교육을 하고 통합교육을 하며 다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겪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알고도 외면한다면 우리아이들의 인권과 교육권에 대한 부당한 불평등이며 이는 반드시 개선되어야 합니다. 지금이 바로 개선되어야 할 때인것 같습니다.
보행연습 중인 최근 지민이

보는 것 같은데 보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 같은데 보는 아이 더 읽기"

뇌성마비 아동에게 생길 수 있는 근골격계 문제

글 : 김지영

뇌성마비 자녀가 성인이 된 후에 엄마가 가장 후회하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재활치료를 좀 더 열심히 받지 않았던 것? 사랑을 더 많이 주지 못했던 것? 뇌병변 장애 자녀가 이제 20대가 된 선배 엄마에게 동료 상담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녀는 의외로 아이의 자세를 바르게 잡아주지 않은 것이 가장 후회된다고 말했다. 가장 후회될 정도라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 아닌가!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부모가 아이의 운동 발달만 생각하다 골격이 틀어진 뒤에서야 뒤늦게 자세 유지에 신경 쓰게 된다. 그런데 생각보다 이에 대한 의료적 지원이 부족한 것 같아 어떤 문제가 생길 수 있는지와 평소에 집에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대비책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우리 아이의 뼈에 무슨 일이?

뇌 손상이 있는 아이들은 좌우 근육과 뼈를 균형 있게 사용하지 못한다. 동시에 아이가 사용하지 않는 뼈와 근육은 퇴화하고 굳는다. 뼈는 서고 걷고 뛰는 등의 활동을 하는 동안 체중에 저항하면서 발달하는데 뇌성마비 아동은 이러한 활동이 어렵다. 자세가 틀어지고 몸이 뻣뻣해지면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걷는 데 지장을 주고 통증, 합병증 등 추가로 따라오는 여러 가지 문제가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 때문에 뇌성마비 아이들은 재활 치료뿐 아니라 근골격 상태를 주기적으로 점검하고 문제가 생기기 전에 적극적으로 선제 대응을 해야 한다.

(1) 고관절 탈구

고관절 탈구는 쉽게 말하면 허벅지 뼈가 골반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발생 시기는 천차만별인데 빠르면 3세 이전에도 겪을 수 있다. 경직이 심할수록, 누워있는 시간이 많을수록, 서거나 걷지 못하는 아이일수록 고관절 탈구가 일어나기 쉽다. 딱 우리 아이와 같은 상황이다. 제하는 경직성 뇌성마비에 누워있는 시간이 많고 아직 서지도 못한다. 다리에 경직이 심한 제하는 재활의학과에서 주기적인 엑스레이 촬영으로 고관절 상태를 점검하고 있는데 아탈구(부분 탈구) 조짐이 보인다고 한다. 병원에서는 경우에 따라 허벅지 안쪽 근육에 보톡스를 맞추거나 향경직제을 처방해 근육에 힘이 덜 들어가도록 하고 있다.
제하의 고관절 사진. 왼쪽 고관절이 조금 더 빠져 있다.

(2) 척추측만

제하는 누워도, 앉아도, 서도 고개가 왼쪽으로 꺾인다. 처음에는 허리에 힘이 없어서 한쪽으로 쓰러지는 줄 알고 앉아있을 때만 쿠션을 받쳐주었다. 그런데 등밀이도 못하는 제하가 눕혀두면 늘 시계방향으로 조금씩 회전하는 것이었다. 자세를 잘 살펴봤더니 좌측 골반을 머리 쪽으로 꺾으며 힘을 주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상체가 시계방향으로 새우처럼 휘면서 고개도 왼쪽으로 꺾이는 모양새였다. 앉아있을 때뿐만 아니라 누워있을 때도 바른 자세를 위한 지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제하처럼 스스로 몸통을 바르게 유지하기 어려운 뇌성마비 아동은 자세를 바르게 잡아주지 않으면 척추 변형이 누적되면서 척추측만증이 올 수 있다.

(3) 골감소증

재활 치료를 받던 아이의 뼈가 부러졌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아이가 통증을 표현하지 못해 다리가 부어오르는 것을 보고서야 병원에 갔다는 사람도 있었다. 치료 강도만 탓할 것이 아닌 것이, 뇌성마비 아이들은 골밀도가 비교적 낮다. 다리뼈에 체중 부하가 되지 않으면 골밀도도 점점 떨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깥 활동량도 적어서 칼슘 흡수를 돕는 비타민D의 합성이 부족하며, 뇌전증으로 항경련제를 복용하는 경우에도 골밀도 소실에 영향을 준다. 골감소증이 심해지면 골다공증으로 진행되어 작은 충격에도 쉽게 뼈가 부러지게 된다.

집에서 도와줄 수 있는 방법

첫 번째는 아이가 서는 것이다.
첫 번째는 아이가 서는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뼈는 서고 걷고 뛰면서 뼈에 실리는 체중에 저항하며 발달한다. 스스로 서 있기 어려운 경우에는 기립기를 사용하면 하루 종일 누워있는 아이에게 잠깐이라도 서 있는 경험을 줄 수 있다. 제하는 한 번에 삼십 분, 하루 두 번 이상 기립기에 세워두는데 아이가 힘들어하지 않으면 좀 더 오래, 더 자주 해줘도 좋다. 집에 기립기가 없다면 이용하고 있는 재활치료실에 요청할 수 있다. (간혹 기립기가 없는 치료실도 있다) 기립기 훈련은 다리의 골밀도를 높이고 고관절 안정성에도 도움이 된다.
기립기 훈련 중인 제하. 바른 자세 유지를 위해 발목 보조기를 착용하고 있다.
두 번째는 아이의 자세를 바르게 잡아주는 것이다.
누워있을 때도, 유모차나 카시트, 피더시트에 앉힐 때도 아이의 골반이 정면을 향하고 있는지, 머리나 허리가 한쪽으로 기울지 않았는지 체크하고 쿠션 등을 받쳐서 바르게 해준다. 제하는 하지 경직이 심해서 다리를 가위 모양으로 교차시키며 힘을 주거나 무릎을 안쪽으로 모으면서 동시에 양발은 바깥쪽으로 뻗으며 힘을 주는 등 고관절이 빠지는 자세를 적극적으로 취한다. 고관절이 안정적으로 관절 안에 유지되기 위해서는 다리를 바깥으로 벌린 자세가 좋은데, 자세를 잡아놔도 아이가 힘을 주게 되면 흐트러지기 때문에 쿠션이나 자세 보조도구를 활용한다.
(좌) 아무런 지지 없이 누워있을 때 나쁜 자세 (우) 자세 보조도구로 보조했을 때 바른 자세
그런데 집에 있는 수건이나 쿠션으로는 한계가 있어서 어떤 것을 쓰면 좋을지 병원에 문의해도 아이에게 딱 맞는 자세 보조 용구를 추천받기가 어려웠다. 보조기기 센터는 생각보다 성인 중심인 데다 소아에 대한 전문성이 비교적 떨어지고 갖추고 있는 소아 용품도 부족했다. 결국 직접 제하에게 맞는 자세 보조 용구를 찾아본 뒤 보조기기 센터에 있는 것은 대여하고, 없는 것은 장애인 보조기기 렌탈 바우처를 이용해 구매했다. 요즘 제하가 쓰고있는 보조기기는 헤드마스터칼라, 삼각형외전베개, 자세변환용구 LBP-02, 자세지지시스템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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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는 골밀도를 높이는 것이다.
골밀도를 높이기 위해 칼슘을 잘 먹이고 칼슘의 흡수를 돕기 위해 비타민 D도 챙겨줘야 한다. 영양제보다도 음식으로 먹는 것이 좋고 하루 2시간 이상 햇볕을 쬐는 것이 좋다. 이외에도 근골격 문제 예방을 위한 규칙적인 스트레칭, 보조기 착용 등이 있으나 그런 것들은 병원이나 치료실에서 비교적 잘 알려주기 때문에 생략한다.
새로운 재활치료실에 가면 선생님이 아이의 치료 목표와 방향을 묻는다. 처음엔 목을 가누고 서고, 걷는 것만 생각하면서 욕심을 부렸는데 지금 제하의 목표는 최소한 고관절이 빠지지 않고 자세가 틀어지지 않는 것이다. 재활치료도 중요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아이 신체의 기본 틀을 잡아 주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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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자세를 도와주는 힙 헬퍼 (Hip helpers)를 소개합니다

글 : 귀요미 엄마

힙헬퍼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저는 29개월 다운증후군 남아의 엄마에요. ‘힙 헬퍼(Hip helpers)’를 소개하고 싶어 글을 쓰게 되었어요. 아이가 36주 미숙아로 태어나, 거주 지역(서초구)의 ‘이른둥이 서비스’로 물리치료사 선생님께서 매주 방문해 주셨어요. 선생님께서 아이가 10개월쯤 되어 네발기기를 시도하려 할 때, 힙 헬퍼를 소개하시며 선물로 주고 가셨어요. 쫄바지처럼 생겨 어린 아기에게 불편할 것 같았는데, 착용 시간을 점점 늘려서 가능한 많은 시간을 입혀보자 하셨어요. 이게 뭔지 궁금해서 구글링해보았고, 근 긴장도가 떨어져 다리를 과도하게 벌리고 있거나, 엉덩이 주위의 근육이 약한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아이디어 제품이었어요.

좋은 자세를 잡도록 도와주는 보조도구

저긴장 근육의 아이들에게 입혀서 체간 등의 힘을 써서 올바른 자세를 유도하여 기어다니게 도와주고, 나아가 보행 시에도 팔자걸음 등이 아닌 예쁜 걸음걸이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보조도구였어요. 그리고 미국 본사 홈페이지인 www.hiphelpers.com 에 보면 다양한 후기 및 착용 전, 후의 아이들 영상이 있는데 그 영상을 보면 구입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하루 1~2시간 정도로 시작하여 매주 시간을 조금씩 늘려갔고 다행히 아이가 거부반응 없이 마치 일상복을 입듯 잘 적응해 주었어요. 아이가 워낙 어렸을 때라 싫고 좋고가 없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좋은 시점에 소개받은 것에 감사해요.
늘 도움을 받기만 하는, 같은 해에 태어난 다운증후군 친구들 60명의 엄마들이 있는 커뮤니티가 있어 바로 소개하였고 그 중 힙 헬퍼를 아는 분이 한 분도 없었던 것 같아요. (심지어 물리치료사나 의사선생님들께 구입 여부를 의논드려도 모르시는 경우가 많았다고 해요, 해외에서는 이미 많이 보급되어있는 것 같아요.) 다들 영상을 보시더니 많은 인원이 원해, 미국 본사에 단체로 직구를 하게 되었어요.

골반(힙)부터 모아줘요

다운증후군 아이들이 종종 보여주는, 두 다리를 양쪽으로 180도 쫙 벌려서 넘기는 동작을 저희 아이도 간간히 했는데 힙 헬퍼를 착용하면, 그 동작을 할 수 없으니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게 되었고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그 행동은 전혀 보여주지 않아 그것만으로도 대만족이에요. 언제나 개구리 다리처럼 다리 벌리고 자던 아이였는데, 요즘은 다리 붙이고 자는 것 보면 이것도 힙 헬퍼 덕분인 것 같아요.

꾸준한 착용이 중요해요

아이 24개월 즈음부터는 비교적 예쁘고 안정적인 보행이 가능하여, 힙 헬퍼를 소개해 주신 선생님께서 더 이상 착용 안 해도 되겠다고 하시며 힙 헬퍼 관련 글을 부탁하셨어요. 그래서 함께 직구했던 엄마들에게도 착용 후기를 물어보았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이가 힘들어하여 적응을 못한 경우, 치료사들의 다양한 의견, 네발기기 시작 후 착용하였더니 네발기기를 멈추거나 더디어져서 부모가 마음이 불안해 포기하게 되는 등 다양한 이유로 저희처럼 지속적으로 착용한 아이가 거의 없었는데, 저와 치료실에서 가끔 만나던 한 명의 엄마만 열심히 입히고 있었고, 그 결과는 저희와 거의 비슷했어요. 그 친구도 보여주던 다리 찢어 벌리기 동작은 완전히 잊어버린 것 같고, 자세도 예쁘게 자리잡혀 앞으로도 쭉 착용할 계획이라고 하셨어요.
이즈음 제가 느낀 바는 힙 헬퍼를 지속적으로 꾸준히 착용하는 게 가장 중요한데, 우리 엄마들이 아이들 케어로 워낙 바쁘다 보니 지속이 힘든 것 같았어요. 다행히도 저희는 힙 헬퍼를 소개하신 선생님께서 매주 오셔서 점검해 주셨고, 성장에 따라 제품 업그레이드도 해주시니, 귀찮고 힘들 때도 있었지만, 덕분에 함께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만약 선생님이 안 계시고 저 혼자 제품만 받았더라면 저도 중도 하차하였을 것 같아요.
소개해 주시고 계속적으로 점검해 주신, 서초아이발달센터 최진희 센터장님과 김아람 선생님께 큰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글을 맺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자세를 도와주는 힙 헬퍼 (Hip helpers)를 소개합니다 더 읽기"

장애인 가족이 이사하기 전 알아두면 좋을 것들

글 : 김지영

아이를 키우다 보면 적어도 한 번은 이사할 일이 생긴다. 우리에게는 제하가 특수학교에 입학할 때 그 시기가 찾아왔다. 특수학교 입학 심사에는 아이의 장애 유형과 정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지만, 지원자 대부분이 중증 장애인이기 때문에 거주지가 학교와 가까운 사람을 우선으로 배치하게 된다. 당시 살던 곳 부근에는 특수학교가 없었기에 이사가 불가피해서 원서를 내기 전에 이사할 곳을 먼저 알아봤다. 그런데 우리 가족에게 이사는 단순히 집과 살림살이를 옮기는 것 이상이었다. 매일 다니는 치료실, 연계된 기관과도 멀어지기 때문이다.

어디로 이사해야 할까?

일반적인 가정에서 고려하는 집값, 주변 환경 외에 우리가 살펴본 기준은 아래와 같다.
- 아이가 다닐 특수학교와 가까운가?
- 주변에 재활치료, 장애인 복지 시설이 있는가?
- 아이가 주로 이용하는 의료 기관과 너무 멀지 않은가? (주로 이용하는 병원)
- 다른 가족 구성원이 살기에도 적합한가? (형제자매의 학교, 부모 직장과의 거리)
지원한 특수학교와의 거리가 1순위이긴 했지만, 제하는 요금이 저렴한 장애인콜택시를 이용할 수 있으니 쌍둥이 형제가 유치원까지 걸어서 갈 수 있는지도 중요했다. 그렇게 특수학교까지 차로 10분, 유치원까지 걸어서 10분 거리인 곳으로 정했다. 어쩌다 보니 우리가 이사를 계획한 곳은 서울시 25개 자치구에서 장애인 인구가 2순위로 많은 곳이었다. 자연스레 복지관 등 장애인 복지 시설뿐 아니라 재활치료 받을 곳도 많았다. 제하의 출생병원이자 주 이용 병원인 대학병원까지는 차로 30분 거리였다. 남편은 어차피 6개월에서 1년에 한 번 근무지가 바뀌기 때문에 직장과의 거리는 크게 상관없었다.
이 외에 부수적으로 고려했던 것은 엘리베이터가 있는지, 짐을 충분히 넣을 공간이 있는지, 빛이 잘 들어오는지 등이었다. 원래 살던 곳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빌라의 2층이었는데 제하를 안거나 유모차를 들고 오르내리기에는 힘들고 위험했다. 성격이 급한 나는 한 번에 하나씩 옮기는 시간이 아까워서 한 손에 제하, 다른 한 손에는 유모차를 들고 다녔는데 집주인은 그런 나를 마주할 때마다 안쓰러운 눈빛을 보내며 혀를 끌끌 찼다. 그러는 동안 나의 손목은 탈탈 털렸고 승모근은 점점 발달했다. 제하의 키가 클수록 자세도 틀어지고 일반 유모차로는 커버하기가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지만 크고 무거운 장애인 유모차 구입을 이사 후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머무르는 곳의 환경이 심리에 미치는 영향은 크다. 아픈 아이와 사는 경우 집에 있는 시간이 더 많기에 그만큼 중요한 것 같다. 제하의 짐은 형의 두 배 이상이었는데 특수 분유, 피딩 용품 등 온갖 의료용품 박스에 둘러싸여 살다 보니 정리를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다. 창밖에는 맞은편 집이 가까이 붙어있으니 빛도 잘 들어오지 않았다. 정돈되지 않고 어두운 집에 있으면 기분도 우중충했다. 이사 후 수납공간이 넉넉해지니 용품과 기기를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보관할 수 있게 되었고 창밖으로 탁 트인 풍경이 시원하게 들어왔다. 이제 집에만 있는 날에도 울적하지 않았고, 마음도 차분해졌다.
이사 후 장애인 유모차에 탑승한 제하

이사 전후로 준비해야 할 것은?

- 재활치료 대기

제하의 일과 중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재활 치료. 며칠만 빠져도 몸이 뻣뻣해지는데 집에서 착실하게 해줄 자신이 없어서 남편이 집을 알아보는 동안 나는 대학병원, 재활의학과 의원, 복지관 등 이사할 곳과 가까운 치료기관을 먼저 알아봤다. 대기 기간을 감안해서 가능한 일찍 진료받는 것이 좋은데, 우리는 지원할 학교와 이사 날만 먼저 정한 상태라 집을 정하고 나서 진료를 보면 너무 늦을 것 같았다. 대략 어느 동네로 가겠거니, 생각하고 그곳에서 차로 20분 이내의 시설을 추려 명단을 만들고 거리가 가까운 순서로 전화를 돌려 진료와 상담 예약을 잡았다. 그때가 이사 3개월 전이었다.
대학병원은 진료 예약 시 구비서류를 안내해 주는데 보통 기존 병원에서 진료의뢰서를 받아서 가야 한다. 소견서나 발달평가지 등을 같이 가져가면 더 좋긴 하지만 대기를 위한 진료라 기존에 어떤 치료를 받았는지 정도만 말해줘도 충분하다. 복지관은 사회복지사와 초기 상담을 먼저 한 후 어떤 치료가 필요할지 치료사의 평가를 받고 대기하기 때문에 최소 2번 이상의 방문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간혹 전화로 상담하고 이메일로 자료를 전송하는 등 비대면으로 치료 대기를 할 수 있는 복지관도 있었다. 그렇게 대기를 걸어두면 기관마다 최소 6개월에서 1년은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들어서 막막했는데, 이사하자마자 일주일 재활 스케줄이 꽉 찼다. 제하가 다른 대기자에 비해 어리고 중증인 편이라 순번이 당겨졌다는 곳도 있었고, 오전이 오후에 비해 대기가 짧은 덕분이기도 했다.

- 지원 기관 연결해 두기

장애인가족지원센터, 장애인종합복지관, 종합사회복지관, 가족센터, 아동복지관, 육아종합지원센터, 발달지원센터, 문화복지센터... 지역마다 있는 장애인 가족 지원 기관 및 복지 시설이다. 이들 대부분이 SNS나 카카오톡 등으로 행사 등을 공지하기 때문에 지원이 필요하다면 친구 추가를 해두는 것이 좋다. 복지관에 사례관리 신청을 해서 사회복지사와 관계를 맺어두는 것도 도움이 된다. 장애인 가족과 같이 경제, 심리 문제 등 복합적인 어려움으로 복지서비스가 필요한 가족을 면밀히 살피고 직접적으로 지원해 주거나 외부 자원을 연계해 준다. 사회복지관과 장애인복지관이 지원할 수 있는 영역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두 곳 모두 신청해 두었다.
재활치료나 복지 시설을 찾을 때 참고한 것이 성동장애인종합복지관에서 만든 ‘WheelRing(휠링)' 앱인데 재활치료, 장애인복지관, 교육, 보조기기 관련 시설 등이 권역별로 정리되어 있어 편리했다.

- 돌봄 대기

나는 장애, 비장애 쌍둥이 형제를 양육하고 있어 장애아동돌봄(장애아가족양육지원사업)과 아이돌봄서비스를 모두 이용했다. 두 서비스 모두 원한다고 바로 이용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순번이 되어야 하기때문에 이 또한 미리 대기를 해둬야 한다. 아이돌봄서비스는 이사 후 전입신고를 해야 해당 지역 서비스 제공 기관(자치구 가족센터 등)에 신청할 수 있는 반면, 장애아동돌봄은 이사 전이라도 주소가 결정되었다면 미리 대기를 할 수 있다.

- 이사 당일 아이 맡기기

내가 결혼하고 우리 가족의 첫 이사이자 아이와, 장애 자녀와 처음으로 함께했던 이사. 유비무환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준비를 철저히 해도 빠뜨리는 것이 생기고 어려운 것이 이사인 것 같다. 새로운 보금자리로 옮긴 지 이제 다섯 달이 지난 지금. 돌이켜 보면 무슨 정신으로 저걸 다 했나 싶고 생각만 해도 피곤하지만, 이렇게 기록해 두니 다음에는 좀 덜 겁내고 좀 더 수월하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사를 준비하는, 언젠가 이사를 해야 할 가족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장애인 가족이 이사하기 전 알아두면 좋을 것들 더 읽기"

장애 자녀를 돌보면서 내 삶을 사는 방법

글 : 김지영

아픈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의 삶 다음으로 나를 두렵게 한 것은 내 삶이 없어지는 것이었다. 기본적인 돌봄 외에도 매일 다니는 재활치료에 대학병원 외래가 많을 때는 한 달에 10개가 넘었다. 아이가 수술이나 컨디션 난조로 몇 달을 병원에 장기 입원하게 될 때면 닭장 같은 병실에 갇혀 막연한 불안함에 휩싸였다. 이대로 병원과 치료실에서 내 삶의 대부분을 보내야 하는 걸까. 내 시간이 없는 이 삶이 영원히 계속되지 않을까. 숨이 턱 막혔다. 답답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꿈은 소박해졌다. 카페에서 커피 한잔할 여유라도 있었으면, 혼자 밖에 한 번 나가봤으면. 한편 걱정 속에서도 아이는 아이 나름대로 자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입원 횟수도 줄어들고 도와주는 사람도 생기고, 요령도 생겼다.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주저 없이 맡기기

친정과 시댁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상황인 데다 콧줄에 배변 봉투까지 달고 있는 제하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건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쌍둥이를 혼자 감당할 수는 없었다. 여성가족부에서 제공하는 아이돌봄서비스는 비장애 아동만 이용할 수 있어 우선 큰아이를 맡기고 나는 제하를 전담했다. 그러다 18개월 무렵 제하에게 장애인등록증(복지 카드)이 나왔다. 남들은 등록증을 받는 날 눈물이 난다는데 나는 기뻤다. 장애 등급이 있으면 보건복지부의 장애아 가족 양육지원 사업을 신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장애아동돌봄은 보통 돌봄 인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아 몇 년을 대기하는 경우도 있고 어렵게 구한 돌보미가 성에 안 차거나 반대로 선생님이 힘들다며 금방 그만두는 경우도 있다. 나도 신청 후 몇 달의 대기 끝에 제하가 만 2살이 지나서야 돌보미가 왔다. 우리 집에 온 선생님은 돌봄이 처음인 데다 연세도 많았는데 제하를 친손자처럼 사랑으로 돌봐줬고 다 클 때까지 보고 싶다며 활동보조사 자격증까지 땄다. 아쉽게도 우리 가족이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며 눈물로 이별했지만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으며 지낸다.
어린아이를, 그것도 장애가 있는 아이를 남에게 어떻게 맡기냐며 끝까지 직접 돌보는 대단한 사람도 있지만 나는 1년 만에 지쳤다. 물론 아이에게는 엄마가 24시간 붙어있는 것이 좋겠지만 우리가 하는 일은 장거리 달리기이기에 페이스 조절이 필요하다. 엄마의 시간이 많을수록 양육의 질이 높아진다고 생각한다. 선생님이 우리 집에 온 첫날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제하를 맡기고 잠깐 장 보러 나왔을 뿐인데 평일 낮에, 혼자 걷는 그 길에서 감옥에서 출소한 듯 해방감을 느꼈다.
나도 제하를 맡기며 걱정을 전혀 하지않은 건 아니다. 내가 없을 때 아이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을까, 선생님이 서툴러서 응급상황이 생기면 어쩌지? 그렇지만 운이 좋았던 걸까. 돌봄서비스 이용 후 지금까지 이사도 하고 돌보미가 활동 가능한 요일, 시간에 맞추느라 4명의 선생님을 겪었는데 모두 좋은 분이어서 한 번도 교체한 적 없다. 돈보다는 봉사 정신으로 이 일을 하는 분이 대부분이었고 아이도 잘 봐주셨다. 피딩이나 석션 등 선생님 스스로도 잘할 수 있을지 염려했던 일들도 자꾸 경험하며 익숙해졌다.

배우자와 휴식 시간 나누기

남편은 6개월 정도 휴직했다가 큰아이가 어린이집에 들어가면서 복직했다. 이후 남편의 귀가 시간이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발을 동동 구르고 식은땀을 흘렸다. 화장실에 들어가기만 해도 왜 이렇게 안 나오나 싶어 화가 났다. 어쩌다 친구 만나러 잠깐 나가도 되냐고 물으면 그러라고 하면서도 눈치를 줬다. 임신 전까지만 해도 남편은 매년 상, 하반기에 친구들과 2박3일 여행을 다녀왔지만 이제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가도 되냐고 묻는 것 자체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남편은 예전과 변함없이 자기 인생을 사는 것 같고 나만 외로운 싸움을 하는 것 같았다. 내 맘이 이렇다 보니 남편 입장은 생각지도 않은 채 못난 말만 쏟아냈고 우리 사이는 예전과 같지 않았다.
돌보미가 오고 아이가 어린이집도 다니고, 나도 내 나름의 시간을 틈틈이 가지면서 남편과 타협을 했다. 쉴 수 있는 사람이 쉴 수 있을 때 쉬자는 것이다. 주말처럼 남편이 쉬는 날에는 동네 산책을 하든, 먼 곳으로 나들이를 가든 온 가족이 다 같이 움직였고 그래야 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가끔은 엄마나 아빠가 번갈아 가며 혼자 쉬는 것도 좋다. 애들도 크고 우리도 요령이 생기면서 돌보미 없이도 어느 정도는 애 둘을 혼자 볼 수 있게 되었고, 남편을 놔줘야 나도 눈치 안보고 나갈 수 있다는 걸 알기에 선심 쓰듯 보내준다. 남편은 일 년에 두 번 있는 친구들과의 여행에 큰아이를 데리고 간다. 나도 기회가 있을 때 남편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외출도 하고 여행도 다녀온다. 아예 매주 일요일 점심은 나 혼자 외식하는 날로 정한 적도 있다.

우선순위 설정하고 일정 조정하기

돌보미가 아이를 돌봐주는 비교적 긴 시간에 할 수 있는 일도 있지만 아이가 낮잠 잘 때나 치료실에 들어갔을 때 등 자투리 시간을 활용할 수도 있다. 시간 관리는 개인 시간을 확보하는 핵심이다. 스케줄을 잘 조정해 유연하게 활용하고 그 시간에 다른 고민 없이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한 시간을 통해 체력과 멘탈을 유지하고 나의 가치와 삶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지역 장애인가족지원센터와 장애인복지관, 장애인부모회 등 많은 기관에서 자조 모임을 운영해 부모가 서로 지지하며 다양한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시간을 제공한다.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지 모르겠다면, 장애 자녀의 부모로서 삶이 막막하다면 자조 모임을 통해 선배와 동지를 만나보는 것도 좋다. 장애인 자녀를 양육하면서 개인 시간을 갖는 것은 어려운 일일 수 있지만, 시간을 내어 우리 자신을 돌보는 것 또한 아이를 키우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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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을 겪었지만 풀리지 않는 뇌전증

글 : 윤승아

아이의 뇌전증에 대한 애기를 써보려 하니 벌써 먹먹합니다. 뇌전증아이를 13년을 키우며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결론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와 지민이가 열심히 버티고 견디며 지내온 이야기가 어떤 아이와 부모에게 있는 막연한 두려움보다는 하나의 예로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글을 써보려 합니다.

이 글은 참고만 하시고, 반드시 주치의와 의논하세요.

저는 제가 납득이 되고 잘 알아야만 실행이 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민이의 소화계 문제와 뇌전증만큼은 명확한 것이 없어 어려웠습니다. 잘 모르는 상황에서도 아이를 위해 뭔가 결정을 해야 하니 그 과정이 너무나 힘겨웠습니다. 저희 아이보다 훨씬 더 조절 어려운 경련과 그로 인해 어려운 치료를 한 아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민이의 경우를 얘기하는 것이 지민이 보다 어려운 상황이나 전혀 다른 상황을 굒고 있는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고 도움이 안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다 다르므로 쉽게 결론 내고 쉽게 적용해 보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반드시 주치의와 의논해서 아이에게 맞게 결정해야 합니다.

지민이의 뇌전증은…

NICU를 퇴원한 직후에 아이는 뇌파가 정상은 아니었지만 보이는 경련을 하지 않아서 먹는 약 없이 지켜보자고 했습니다. 그러다 생후 8~9개월(교정 6개월)무렵 이상행동이 있어 검사를 받았고 바로 영아연축으로 진단되었습니다. 다행히 사브릴로 비교적 빨리 조절되고 뇌파도 호전되어 8개월 정도 약물을 유지하다가 18개월 무렵 약을 완전 중단하고 1년 반정도 Seizure Free상태를 유지 했었습니다.
뇌전증이 완치되었다는 생각에 그동안 조심하느라 못했던 재활에 매진하며 피로해지고 만3세 무렵 각종 감염에 노출되며 고열이 동반된 열경련을 시작했습니다. 열경련이 두어번 반복되더니 열없는 경련으로 이어져 다시 약을 복용하기 시작한 것이 지금까지 먹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응급실에서 아티반으로 쉽게 멈추기도 했지만 몇 번 반복 후엔 쉽게 멈추지 못하는 간질중첩증이 되어 약을 쏟아 부어도 쉽게 멈추질 못했습니다. 1시간 이상 하는 경우가 대부분 이었습니다. 중환자실을 한달이 멀다하고 들락거리고 치료를 받다가, 혹은 할아버지댁에서, 혹은 외갓댁에서의 경련으로 본의 아니게 여러병원의 응급실과 중환자실을 투어를 하게 되었어요. 보라매서울대병원에 계셨던 담당의를 얼마 안되어 분당서울대에서 만나는 웃픈일도 있었습니다.
중환자실을 가게된 가장 큰 이유는 산소포화도는 유지되는데 내밷는 호흡이 잘 안되어 몸에 이산화탄소 축적이 높아 삽관하게 된 경우였습니다. 일단 삽관을 하면 중환자실에서 경과 관찰 해야 한답니다. 아이는 전조증상이 있었고 부분발작 그리고 대발작 순으로 진행되었는데 초기엔 제가 전조증상이 경련인줄 몰랐던거에요. 그렇게 시간을 많이 끌었고 더 쉽게 멈추지 못했던거라고 합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무서웠던 순간

첫번째는 열없는 경련 초기에 전조증상으로 경련이 시작된 걸 모르고 40여분 후 대발작을 시작해서야 응급실에 갔습니다. 서울대 본원이었는데 아이를 침대에 옮기고 경련약 투여 후 응급 피검사 결과가 나오자 마자 커텐을 치며 저와 남편을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코드00이라는 방송이 나오고 순식간에 여기저기서 의료인들이 달려 오더라구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위기는 넘겼다고, 몸에 쌓인 이산화탄소 수치가 너무 높았다고, 다행히 응급조치로 수치가 낮아져서 입원치료 후 퇴원했었습니다.
두번째는 응급실에서 약물 투약후 멈추었다 생각했는데 보이는 경련이 없어도 심박이 안정되고 깊은 잠이 들지 않으면 완전히 멈춘 것이 아니고 이 경우 2~30분 후 대발작으로 이어지고 그럼 약을 퍼부어도 쉽게 멈추지 못했어요.
당시 아이는 아티반 2회 투약 후 대발작은 멈추었지만 심박이 150으로 높았고 호흡소리도 짧았어요. 멈춘것 같다고 지켜보고 있었지만 40분 정도 후 대발작을 시작했고 응급 메뉴얼로 1~5단계의 경련약이 있는데 4단계까지 5분간격으로 약을 쏟아 부어도 멈추지 않았어요. 마지막 미다졸을 투여하면 자가 호흡이 어려워 반드시 삽관을 해야 하고 중환자실에 입원해야 한다면서 아이는 전신 대발작을 하고 있는데 가서 입원수속을 하고 오라고 하더라구요. 어떻게 수속했는지도 모르게 경황 없이 수속하고 오니 다행히 아이는 대발작은 멈춘 상태였고 중환자실로 옮긴 후 의식을 찾으며 라인을 스스로 하나씩 뽑고 퇴원을 했습니다.

1년이 넘어서야 경련 양상을 파악함

이렇게 아이의 경련을 1년이 넘도록 격어 가며 아이의 경련 양상을 파악 할 수 있었습니다. 전조증상이 있고 전조증상의 시작은 경련이 시작된 것을 의미하고 초기에 조절하지 못하면 쉽게 멈추지 못하고, 심박과 호흡이 안정되고 완전히 잠이 들어야 '멈추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후엔 이 정보를 응급실에 가면 의사와 공유해 매뉴얼 대로 안하고 아티반을 적극 대응하고 보이는 경련이 없어도 심박이 안정화 될때까지 약물을 적극 투여하는 것으로 대응 했습니다. 그리고 초기 조절이 중요하다는 주치의의 처방으로 응급약을 교육받아 경련 5분이내로 항문으로 투약했고 심폐소생술과정을 이수했습니다. 응급약 투약 후 응급실까지 가는 횟수도 좀 줄게되었습니다.

안해본 것이 없다고 생각될 만큼의 수많은 시도들

영아연축때 약물로 Seizure Free한 경험이 있었기에 약물로 빨리 찾으면 조절할 수 있다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약물로 호전은 있었지만 약물로 완전히 조절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모든약을 시도해본것은 아닙니다. 어떤약은 부작용으로 지속시킬 수 없었고 경련 할때마다 약이 붙어서 4~5개의 약을 먹여보기도 했습니다(응급실 투여로 시작된약도 퇴원했다고 금방 종결 할 수 없었어요.). 일단 약을 시작하면 안듣는것 같아도 외래로 정리하는데는 몇달이 걸렸습니다. 지민이는 매일 하는 경련은 아니고 컨디션이 안좋을때 하는거라 약조절이 쉽지 않았습니다. 경련주기가 1달에서 2달이어서 약이 맞는지 확인이 어렵고 오래걸렸습니다. 그 사이 아이는 계속 경련을 했고 체력은 점점 떨어졌고 중요한 발달 시기에 치료에 집중할 수도 없었고 일상은 무너져갔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약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것은 아니였어요. 분명 영향은 있는 것 같은데 딱 멈추진 않더라구요. 점점 짧아지던 간격이 조금 벌어졌고 응급투약과 대처도 조금은 익숙해져서인지 나아졌습니다. 조금 더 맞는 약을 추가하면 멈출 수 있지 않을까 했지만 그걸 찾는 것이 오래 걸리고 잘 찾아지지 않았습니다. 하나씩 추가되면서 아이는 별다르게 호전되지 않고 그러면서 아이는 여러 약들로 힘들어졌습니다.
약으로 조절이 잘 안되니 한약도 1년여 먹여보고, 대체의학인 생의학 요법도 1년정도 해봤습니다. 수술이나 미주신경요법 등의 치료도 가능했으면 시도해 봤을 것 같습니다. 아이는 심각한 발달지연이 예상되는 상태여서 다양한 경험으로 뇌에 여러 자극을 주어야 하는 상태였고 뇌전증치료는 뇌가 자극에 둔감해지도록 눌러주는 것이므로 서로 상반된 입장입니다. 저는 맘이 급해졌습니다. 아이는 발달자극이 필요한 중요한 연령대였는데 뇌전증은 뇌전증대로 잡지도 못하고 치료에 변화도 없이 무심히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사진을 꺼내면서도 다시 마음이 아파오는 그 순간들

나는 이놈(뇌전증)과 평생을 같이 살아가야겠구나 생각한 대발작이 있던 그 날.

응급실에서 발작 후 잠든 아이를 보며, “아이의 뇌전증은 의학적인 치료(약물, 수술, 기타 의학적 치료)로 완치(Seizer Free)는 어려운 게 아닐까? 뇌에 손상이 백질 뿐 아니라 회백질까지 있는데 경련이 없는 게 오히려 더 어려운 거 아닐까? 나와 이 아이는 뇌전증은 평생을 같이 가야 하는 것 아닐까? 당뇨나 고혈압처럼. .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뇨나 고혈압도 약물과 생활습관 개선 등으로 관리하면서 평생을 지내지 않습니까? 나와 아이에겐 뇌전증이 당뇨나 고혈압 같은 거라 생각하니 혼란스럽고 불안했던 아이와 내 삶을 정리 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의 경련이 반복되면서 경련에 대한 대응에 자신감도 좀 생겨나고 있었고 주치의 말씀으론 아이가 대발작이라 심해보이지만 뇌기능이 퇴행되는 경련은 아니라고 했었기에 더이상 완치를 위한 약을 찾느라 삶을 허비하지 말고 이 상태를 유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아이의 경련이 반복되면서 경련에 대한 대응에 자신감도 좀 생겨나고 있었고 주치의 말씀으론 아이가 대발작이라 심해보이지만 뇌기능이 퇴행되는 경련은 아니라고 했었기에 더이상 완치를 위한 약을 찾느라 삶을 허비하지 말고 이 상태를 유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주치의와 상의해서 어느 정도의 약의 갯수를 최소로 하고 최소용량을 유지하면서 다른 경련유발요인을 최소화하고 경련주기를 아이가 다시 회복하고 성장할 수있도록 최대한 늘려보는것을 목표로 치료방향을 정했습니다. 빠른 약조절을 위해 입원을 해서 약을 한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스케쥴을 조정하고 아이가 스트레스 받는 장소와 상황은 최소로 조정했습니다. 잠을 충분히 잘 수 있도록 하고 방에도 숙면을 위해 아무것도 못하고 돌처럼 지켰습니다. 지민이와 비슷한 경우 좀더 많은 약을 많은 용량을 먹고 지민이보다는 좀 덜 자주 경련하지만 지민이는 약을 좀 덜 먹고 일상과 치료와 컨디션 관리를 좀 더 적극적으로 하기로 했습니다.
경련 전 후의 상황을 기록하고 대비했지만 삶이란 게 잘 조절되지도 않았고 아이도 저도 피로감을 잘 알아차릴 수 없어서 쉽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2~3달에 한번씩 경련을 했고 스스로 멈추지 못하고 약물이나 응급조치가 필요한 위험한 경련을 하고 있기에 긴장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 경련이 발생하면 부모의 입장에서 지켜보는 것은 정말 쉽지 않지만 저는 그걸 그냥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저와 아이는 뇌전증과 같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잘 관리해서 길게 11개월정도 대발작이 없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경련 양상도 익숙해지고 있었고 대응방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측이 되었기에 더이상 두렵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아이가 성장하면서 경련 양상도 변한다는걸 알게 되었습니다. 사춘기(초경)가 되면서 또 양상이 바뀌었고 경련주기가 다시 짧아졌습니다. 전조도 없이 바로 대발작을 합니다. 최근에는 경련 주기가 2달이 안되어 회복할 겨를 없이 다시 경련을 해서 약물을 좀 적극적으로 써보고 있습니다. 적어도 아이가 경련 후 체력을 회복 할 정도의 주기는 되어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뇌전증만 바라보고 살 수 는 없었습니다. 장애만 바라보고 살 수는 없었습니다. 장애를 가졌어도 병이있어도 어려움이 있겠지만 우리아이들은 삶을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뇌전증과 같이 지내기로 결심하고 관리하고 지낸 5~6년간은 가끔 행복하단 생각도 하며 살았습니다. 관리하는 기술이 늘어 주기도 조금 길어지고 전조 증상시 경련까지 이어지지 않는 경우 도 많았고 아이도 컨디션 조절로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없었지만 조금씩 시도하고 경험하며 성장했습니다. 지금 막 아이가 아픈걸, 혹은 어려움을 갖게 된걸 알게 된 부모는 10명이면 10명이 낫게 해주고 싶은 맘일 거예요. 그리고 아이가 낫지 않으면 삶도 없고 불행할 것이라 생각하실것 같아요. 저도 그랬으니까요.
뇌가 손상되어 퇴행이 생기거나 생명에 위험이 되는 경우는 적극적 치료를 할 수 밖에 없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한번 쯤 생각해보세요. 아이와 아이의 삶을, 그리고 그아이와 같이 살아갈 나와 다른 가족을. . . 물론, 가끔 한번씩 생각합니다. 어느날 갑자기 경련을 딱 멈추게 되지 않을까?하는 소망을 말입니다.
가정에서의 일상을 즐기는 지민이의 모습

13년을 겪었지만 풀리지 않는 뇌전증 더 읽기"

기록의 쓸모 – 아이의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없다면

글 : 김지영

보톡스를 가장 최근에 맞은 게 언제죠? 어느 손을 더 잘 쓰나요? 아이가 새로운 재활 치료실에 가면 흔히 받는 질문이다. 학교나 복지관에서 만나는 특수교사, 사회복지사는 더 자세한 것을 묻는다. 중환자실에 있었던 기간은요? 어떤 진료를 보고 있나요? 쏟아지는 질문에 머릿속이 하얘진다. 제하가 잘 쓰던 손이 오른손이었나? 그 수술을 언제 받았더라..? 출산할 때 뇌를 같이 낳기라도 한 건지. 누가 갑자기 내 나이를 물으면 생각이 안 나서 계산기를 두드리는 일도 있는데 하물며 제하는 워낙에 이슈가 많아서 더 기억나질 않아 면담이 끝날 때마다 기분이 찜찜했다.

무엇을 기록하면 좋을까?

아이의 이력서, 자기소개서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누가 봐도 어떤 아이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가능한 아이와 관련된 모든 걸 기록해 두고 카테고리별로, 시간순으로 정리를 한다. 사실 나도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기록한 건 아니고 만 3세가 되어서야 필요성을 느끼고 제대로 쓰기 시작했는데 어릴 적 방학 일기처럼 지난 일이 생각도 잘 안 나고 쓰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가능하면 미루지 말고 일찌감치 기록하는 것을 권하고 싶다. 한 번에 다 쓴다고 생각하면 시작하는 것 자체가 어려우니 기록을 늦게 시작해서 밀린 내용이 많다면 틈틈이 조금씩 써보도록 한다. 완성 후에는 변동사항이 있을 때마다 업데이트한다.
경련을 많이 하거나 먹는 약이 많다면 간호일지를 써두는 것도 좋다. 기록을 하면 투약을 빠뜨리는 것을 방지할 수도 있고 돌봄 선생님 등 간병인이 여러 명일 때 인수인계하기도 수월하다. 경련, 발열 등 새로운 증상이 있을 때마다 기록하면 외래 진료나 응급실에 갔을 때 아이의 상태를 설명하기가 쉬워진다. 장 절제 수술을 받은 우리 아이처럼 먹는 양과 배설 횟수 등이 중요한 경우라면 병원에서 하는 것처럼 섭취량, 배설량 및 시간 등 모든 것을 기록한다.
재활 치료를 받는다면 치료사의 코멘트를 그때그때 써 둔다. 아이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치료사가 부모보다 더 많은 것을 알 수도 있다. 아이를 유심히 관찰할 겨를이 없는 나는 아이가 왼쪽을 더 잘 본다, 오른손을 더 잘 쓴다는 것을 치료사를 통해 알게 되었다. 기록을 잘 해두면 원하는 치료 방향에 대해서도 그림이 잘 그려진다.
기록은 데스크탑, 태블릿, 휴대전화 중에서 본인이 활용하기 가장 간편한 매체를 활용한다. 다만 내용을 공유할 때는 파일보다는 종이에 출력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전체 내용은 프린트하기 편한 형태로 저장한다. 나의 경우 일지는 휴대전화에, 포트폴리오는 노트북으로 작업한다.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보육 기관, 교육 기관, 활동 기관, 거주 기관, 의료 기관 등 아이가 살아가는 동안 도움을 주는 기관과 사람은 그때그때 다를 수 있다. 공들인 기록은 병원을 옮길 때나 새로운 치료실에 갈 때 등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아이의 소개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내 경우 다른 지역으로 이사할 때 이 기록물이 진가를 발휘했다. 치료실을 옮길 때, 특수학교에 입학할 때 첫 시간은 아이에 대해 면담을 했는데 이때 선생님께 미리 만들어 둔 기록을 토대로 이야기를 나누거나 프린트한 것을 전하니 내가 놓친 건 없나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기록물을 통째로 전달할 수도 있지만 대상에 따라 필요한 내용만 따로 빼서 줄 수도 있다. 상대가 필요하지 않은 내용까지 다 줘버리면 방대한 양에 압도되어 자료를 펼칠 엄두도 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다른 사람뿐 아니라 내가 확인해야 할 사항이 있을 때마다 아이에 관한 백과사전처럼 꺼내 쓰기도 한다.
아이에 대한 기록은 부모가 같은 말을 반복해야 하는 면담의 보조자료로, 아이의 특성이 반영된 이력서로, 평생교육을 위한 객관적 근거로, 일관성 있는 지원을 위한 삶의 자료가 될 것이다. 지금 당장 할 일을 하면서도 머릿속에는 그다음에 해야 할 일들로 가득 차 있는 우리의 머릿속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해주기를 바라며!!!

기록의 쓸모 – 아이의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없다면 더 읽기"

그동안 겪었던 소화기 문제들

글 : 윤승아

아이는 뇌병변의 후유증으로 뇌병변장애와 지적장애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장애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아이가 아픈 걸 지켜보는 일인 것 같습니다. 지민이의 경우는 소화의 문제와 뇌전증이었어요.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뇌병변이 기저 원인이기 때문에 대처하기 어렵고 도와줄 방법이 많지 않아서 더욱더 힘들었습니다. 오늘은 이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먹고 소화시키는 것의 어려움

이른둥이였던 지민이는 젖병 빠는 힘이 약하고 양이 작아 먹이는 것 자체가 큰 일이었습니다. 목표 용량을 먹이려면 40분 이상을 먹여야 했고 그나마도 잘 먹지 못해서 자주 먹이고 싶었지만, 자는 시간과 치료 시간을 고려해 자주 먹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유식은 많이 늦게 시작하지 않았지만 36개월 전후로 많은 병치례를 하면서 쉽게 밥을 먹는 단계로 넘어가지는 못했어요. 꽤 오래 후기 이유식 형태로 먹였습니다. 치료를 위해 차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길어서 간단하게 먹어야 하기도 했고, 소화기관에 탈이 나는 경우가 많아 소화가 잘되는 재료를 선택하고 고기나 덩어리는 거의 다지거나 갈아서 만들어 주었죠. 밥은 후기 이유식 형태였고 단백질은 주로 흰살 생선을 먹였습니다. 소화가 어려운 기름지거나 밀가루 음식은 못먹였어요. 우유도 자주 탈이 나서 일반 우유는 안먹였습니다. 빵을 먹여 본 것은 5~6살이 넘어서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소화가 잘되는 음식을 먹였습니다. 아이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제게도 당장은 이런 방법이 편했습니다
고열을 동반한 감기나 감염병에 걸렸을 때 열이 내리고 난 직후 꼬박 하루를 내리 울었습니다. 아이가 먹지도 않고 소변과 배변도 잘 안되고 하루종일 울어대는데, 이유도 모르겠고 미칠것 같았어요. 영아기의 어린 아기가 열이 날 때는 울기보다는 오히려 쳐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이가 운다는 것은 통증을 동반한다는 것이고, 외과적으로 다친게 아니면 배앓이가 가능성이 높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응급실에 데려갔지만 의사는 “막연한 추측으로 아이를 치료할 순 없고 정밀 검사를 해야하는데 협조도 안되고 많이 힘들거다. 그 정도 병치례 후엔 속병이 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조금 쉬면 회복될거다”라고 하였고 관장을 좀 해주거나 위장관운동을 도와주는 약을 주는 것이 다였고 선생님 말처럼 만 하루를 쉬면 회복하기는 했습니다.
열이 난 후 회복기의 증상 이외에도 유아기엔 수면중이나 기상 후 1시간 내외로 식은땀을 흘리고 손발이 차갑게 되고 침을 힘겹게 삼키며 안절부절 못하는(뭔가 갑작스런 통증을 참는 듯한)증상이 반복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주로 10분 이내로 금세 언제 그랬냐는듯 잘 놀았습니다. 트림이나 방귀를 뀌면서 증상이 없어지기도 하였지만, 증상이 수차례 반복되는 경우엔 경련으로 이어졌습니다.

저체중과 영양 부족

저는 여기저기에서 만나는 모든 전문가와 부모들에게 이 문제를 공유했지만 답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아이들이 성장하며 장도 길어지고 그래서 소화력이 약한 아이들은 점점더 힘들어지고 문제가 생길 확률도 높다고 하더군요. 더군다나 지민이는 저긴장아이라 어쩌면 이런 문제가 당연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한약도 먹여보고 대체의학에서 하는 보충제도 먹여봤지만 큰 도움은 안되었던것 같아요. 자연히 체중도 쉽게 늘지 않았습니다. 9kg을 넘기는것이 아주 오래걸렸고 만 24개월이 한참 지나서야 10kg대에 진입했어요. 경련안하게 소화장애 안상기게 조심하다보니 아이가 말라가는걸 미처 못느낀것이죠.
그러다 4세 무렵, 그날도 원인 모를 복통에 안되겠다 싶어 대학 병원에 진료를 보러갔다가 초저체중의 영양실조 상태라고 당장 입원하라고 해서 당일 바로 입원해서 검사를 진행 했습니다. 저는 아이를 매일매일 보니까 아이가 그렇게까지 말라있는지 깨닿지 못했어요. 재활치료와 병치례에 정신이 없었고 당시 부모님들도 많이 편찮으셨고 저 역시 수술을 해야 했어서 경황이 없었나봐요. 우연히 찍은 아이 사진을 보니 TV에 나오는 아프리카 기아난민같이 말라 있었어요. 사진으로 보니 더 명확하게 보였습니다. (너무 마음이 아파 이때 사진은 다 없앴습니다.TT)
협조가 안되어 검사를 하기가 쉽지 않았고 겨우 내시경과 삼키는 기능과 관련된 검사만 할 수 있었어요. 꼭 닫혀 있어야 하는 식도 입구가 거의 열려 있다고 해요. 그때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습니다. 아이의 근육 긴장도가 저긴장으로 정상이 아닌데 내장기관도 정상이 아닐 거란 생각은 왜 못했을까…
의사는 “식도역류로 추정진단하고 치료를 해보자. 호전되면 유지하고 호전이 안되면 다른방법을 찾자"고 해서 1년간 치료를 했습니다. 유아의 식도역류증상은 몸이 활처럼 휘는데, 그 모습이 꼭 경련 같아서 경련으로 오인되기도 한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이후로도 소화기치료는 빈도가 좀 줄었지만 계속되었습니다.

계속되는 악순환의 고리 끊어내기

악순환이 계속되며 아이는 말라갔습니다.
깡말랐던 4세 무렵
그러다가 아이가 만 5~6세 정도 되었을때 우연히 만난 특수교사가 수업전 평가, 상담시간에 지민이의 전반적인 일상생활을 물어보시며 지민이의 섭식방식에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이 나이에 섭식에 특별한 어려움이 있는 것이 아닌데 계속 후기 이유식 형태의 음식을 먹는 것에 놀라셨고 계속 유동식만 먹고 씹지 않으면 점점 더 씹는 기능과 소화기관의 소화력도 약해져 소화가 안되고, 장기적으로 봤을 때 경련에도 안좋은 영향을 준다. 그 문제로 생명이 위험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아이가 소화력에 문제가 생기면 경련을 한다고 얘기했지만 선생님은 당장은 경련을 하더라도 소화력을 키워 줘야 한다는 겁니다. 제가 납득을 하지 못하자 본인의 동생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교통사고로 사지마비의 뇌병변장애를 가지게 되었고 뇌전증도 있고 호흡, 소화 전반에 문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인기에도 이러한 문제가 해소되지 않았고 결국 그 문제로 20대에 떠나보내게 되었다고요. 생각지도 못한 결말에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습니다.
며칠을 고민하던 저는 경련을 할 각오로 시도해 보기로 했습니다. 두려움과 걱정으로 시도해봤다가 후회했다가를 반복하면서 악순환이 계속 되었지만 여기에 시간이 더해지며 아이는 조금씩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체중도 물론 5%ile 이내이지만 그래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다 초등 2학년때 경련 주기가 짧아지고 많이 아프면서 또 체중이 그래프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래서 '살찌우기 프로젝트'로 영양사처럼 식단스케줄을 치료스케줄과 같이 짰습니다. 자기 전엔 2시간엔 공복을 유지하고 식사나 간식 직후 40분 이내엔 이동과 운동을 금하니 식사 3번, 간식 2번을 먹일 수 있었습니다. 열심히 먹였습니다. 대학병원 영양사였던 유치원 친구 어머니의 도움으로 고열량이면서 소화가 잘되는 음식을 추천받아 모든 치료에 우선해서 규칙적으로 먹였습니다. 그러자 몸무게가 조금씩 늘고 운동기능이 조금씩 올라가며 가속도가 붙었습니다.

소화제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깨닫다

비슷한 시기에 수소문하여 소아 소화기 전문의를 찾아가 상담을 했습니다. 의사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아니지만 그때 상담후 제가 느낀 결론은 “모른다”였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들렸습니다. 그분이 무능력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저명한 분이시고 지민이같은 뇌병변아이들의 성장을 많이 지켜봐온 분이셨습니다. 선생님은 “뇌손상을 받은 아이들의 섭식과 소화기의 문제는 예상하기 힘들다. 내장과 뇌가 연결되어 있다. 크면서 좋아지는 경우도 있고 크면서 나빠지는 경우도 있다"고 하면서 당시 식도역류로 소화기 약 3가지를 1년 넘게 먹이고 있었는데 당장 먹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이가 스스로의 능력을 키울 수 없다. 소화기약 자체가 오래된 1세대 약이 많고 아이에게 장기 복용하면 아이 기능이 오히려 약해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지민이가 힘들어하는 부분은 어쩌면 특정 질병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소화제 같은 약으로는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몸 전체를 관장하는 뇌를 편안하게 해주어야 하겠구나.

우리 아이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보기

신경과 주치의와 의논해서 뇌가 쉴수있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다 '수면'이 아닐까 여겨져서 현재는 밤에 숙면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다행히 조금은 호전이 되었습니다.
아이가 커갈수록 생각보다 훨씬 많은 양의 음식을 먹여야 하는데, 섭식이 잘 안되면 유동식만으로는 일반 식사의 영양과 열량을 공급해주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섭식에 문제가 있다면 섭식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영양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 할 것 같아요. 아이의 운동기능과 활동 양도 고려해야 하고요.
우리 몸은 사용하지 않으면 발달을 하지 않습니다. 걷지 않거나 손의 기능이 떨어진 상태로 자란 아이들은 성장해서도 손과 발이 어린 아이처럼 작습니다. 운동 뿐만 아니라 몸의 여러 기능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씹지 않으면 관련된 관절과 근육이 약화됩니다. 단단한 것을 씹지 못하고 힘들어 한다고 부드러운 것만 먹이면 점점 더 씹지 못하게 됩니다.
물론 모든 아이들이 저희아이와 같진 않습니다. 무조건 아이 상황과 맞지 않는 무리한 시도를 하시면 안됩니다. 하지만 비슷한 악순환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합니다. 반드시 전문가의 조언을 받으며 조금씩이라도 변화를 시도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아이가 못할 것이라고 지레 생각했던 것들 중 의외로 많은 부분에서 아이들은 조금씩 해내곤 합니다.
아이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부모가 기회를 주지 않아서 또는 그 기회를 너무 일찍 주어서 또는 몇 번 시도하고 부모가 포기해서 일수도 있습니다.
학교에서 스스로 다양한 음식을 먹는 최근 지민이의 모습

그동안 겪었던 소화기 문제들 더 읽기"

장애 자녀에 가려진 아동기 비장애 자녀, 어떻게 대해야 할까?

글 : 김지영

제하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만난 옆 침대의 고등학생 여자아이는 수술 후 몸이 아프고 불편할 텐데도 너무나 밝았다. 병원에 있는 내내 엄마에게 고맙다, 사랑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지냈다. 어떻게 키웠길래 아이가 저렇게 예쁜 말만 하느냐고 물었다. 어머님은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딸은 몸이 안 좋아서 온종일 붙어 지내니까 밝은데, 아들은 엄마와 말도 안 섞는다는 것이었다.

내 동생은 장애인이에요.

장애 아동의 부모가 간과하기 쉬운 것 중 하나가 비장애 자녀일 것이다. 부모는 아픈 아이에게 온 신경을 쏟느라 다른 아이에게는 시간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줄 수 있는 것이 부족해진다. 돌이켜 보면 나도 제하의 형과 진득하게 앉아 놀아준 시간이 손에 꼽히는 것 같다. 형은 돌봄 선생님에게 맡기고 제하를 데리고 매일 같이 재활을 다녔고, 제하가 수술을 하거나 컨디션이 안 좋을 때는 병원에 입원하느라 형은 몇 달을 제대로 못 본 적도 있었다. 한 번은 돌봄 선생님이 아이의 목소리를 녹음해 보내줬다. “엄마 보고싶어요... (울먹울먹) 엄마 보고싶어요...” 아직 25개월밖에 안되었을 때였는데 엄마가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덩치도 제하보다 훨씬 크고 정상 발달을 하고 있으니 누가 봐도 형이기에 우리도 편의상 ‘첫째’, ‘형’이라고 칭하지만, 사실 제욱이는 뱃속에서 몇 초 먼저 나온 쌍둥이 형제다. 두 돌 때까지는 내가 제하를 안고 있으면 제욱이가 달려와서 때리거나 꼬집고 도망가기 일쑤였다. 나도 안아달라고 울부짖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이의 속도 모르고 혼을 냈다.
“엄마, 제하는 아기라서 아직 못 걸어?” 아이의 물음에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다 제하도 이젠 아기라는 핑계가 먹히지 않을 정도로 자라서 장애인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아직 제욱이는 ‘장애인’이라는 명칭에 대해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길에서 장애인콜택시를 마주치면 반가워하고, 장애인 주차구역을 보면 신이 나서 우리 자리라고 말했다. 내 이야기를 들은 나와 같은 처지의 지인은 벌써 아이에게 장애인이라는 걸 알려줬느냐고 놀라서 물었다. 장애, 비장애 남매를 키우는 지인은 초등학생인 누나가 슬슬 동생이 장애인이라는 걸 부끄러워하고 감추고 싶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 아이도 곧 겪을 일일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나도 엄마 아빠의 아이잖아요

장애를 가진 형제자매를 둔 2~30대 청년들이 만든 자조모임이 있다. ‘나는’이라는 이 모임에서 출판한 책 는 장애 가정에서 비장애 형제자매가 주인공이 되어 자신들의 경험과 상처를 돌보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아이의 심정에 대해 짐작해보고 미래에 겪게 될 문제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나도 엄마 아빠의 보살핌이 필요한 아인데, 장애 형제 때문에 손해 보고 차별받는 것 같은 좌절감과 분노. 그럼에도 내가 장애 형제를 돌봐야 한다, 부모님이 기대하는 만큼 내가 더 잘해야 하고 착하게 굴어야 한다는 책임감과 부담감. 일이 잘 풀리면 내 형제도 건강했다면 나처럼 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에 드는 죄책감, 반대로 일이 잘못되면 이게 다 형제 때문이고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원망과 그 생각 끝에 드는 죄책감. 장애 형제와 함께 살면서 드는 복잡한 감정은 다른 누구에게, 심지어 부모에게조차 온전히 말하기도 이해받기도 어렵다고 한다.

부모가 비장애 자녀에게 해줘야 할 일

비장애 자녀는 마음에 상처를 입기 쉬운 환경에 있기에 부모가 먼저 다가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첫째는 사랑을 많이 표현할 것. 장애 형제가 아파서 하루 종일 돌보고 있지만 나는 너 또한 사랑한다는 것을 꼭 알려주면 좋겠다. 아이의 입원으로 엄마나 아빠가 장기간 떨어져 있어야 할 경우에는 매일 영상통화를 하든 주말만 보호자를 교대하든 면회를 오게 하든 아이가 부모의 얼굴을 볼 수 있도록, 너를 항상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 좋겠다.
둘째는 둘만의 시간을 가질 것. 장애아동 돌봄 선생님이 온 뒤로는 제하를 맡기고 첫째 어린이집 하원 후 가까운 놀이터에 가거나 어린이박물관 등 가끔은 아이가 좋아할 만한 곳을 찾아 조금 멀리까지 버스를 타고 다녔다. 밖에 나갈 시간이 없다면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집에서 놀아줘도 충분하다. 아이에게는 함께하는 시간의 양보다 질이 중요하니까.
셋째는 만약 아이가 장애에 관해 물어보면 정확하게 얘기해줄 것. 이야기 해줘도 이해 못할 거라고 대충 얼버무리면 비장애 자녀는 자신에게도 형제와 같은 장애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하게 될 수 있다. 어떻게 해서 장애가 생겼고 어디가 불편한지 아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잘 이야기해주는 것이 좋다.
넷째는 장애 아이 양육에 너무 올인하지 말 것. 부모가 그로 인해 불행한 인생을 사는 모습은 아이에게도 큰 짐이 된다. 또한 아픈 아이를 탓할 수 없기에 부모가 힘들수록 비장애 자녀를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대할 수 있다. 나도 제하를 돌보면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첫째에게 화를 못 참는 순간이 많았고 감정적으로 육아를 했다. 힘든 와중이지만 부모 인생도 즐기며 사는 것이 우리에게도 아이에게도 필요하다.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비장애 자녀는 말 못 할 고민을 떠안을 수밖에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와 대화를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가 속 이야기를 편하게 털어놓을 수 있게 하고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공감해줘야 한다. 대화가 어려운 경우에는 심리상담을 받도록 하거나 장애인복지관 등에서 제공하는 비장애 형제 지원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다.
제욱이는 심리상담을 받기에는 아직 어린 만 4세이기에 놀이치료를 시작했다. 담당 선생님께는 문제 행동을 해결하기보다는 제욱이가 지금까지 겪었을 결핍을 다독여주고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싶다고 했다. 놀아달라고, 뭔가 해달라고 할 때마다 제하를 돌보느라 뒷전으로 미뤘던 일. 아이의 입장에서 충분히 요구할 수 있는 일인데 제하 때문에 안된다고 거절했던 것들. 덜 안아주고 많이 웃어주지 못한 기억을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아이의 눈을, 마음을 한 번 더 들여다보자고 오늘도 다짐한다.

장애 자녀에 가려진 아동기 비장애 자녀, 어떻게 대해야 할까? 더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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