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사회로 나아가기 : 가족에서 사회로

글 : 윤승아

나 그리고 가족

영아기일때는 사실 이 상황을 내 스스로 받아들이고 가족들이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벅찼습니다. 내아이에게 닥친 불행에 대한 가슴찢어지는 고통, 뭘해야할 지 모르는 무지에서 오는 불안, 당황, 좌절감, 뭐 모든 부정적 감정들이 쏟아졌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도 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대처할 능력과 지식도 생기고 가족들도 받아들여 이해와 지원을 받게 됩니다. 재활을 열심히 해야한다는 목표로 달리며 이제 좀 살아갈 힘이 생기면, 아이는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과 지낼 수 있는 활동지원, 교육기관의 이용 기회가 생깁니다. 저와 아이는 같이 사회로 나가는 첫 연습을 하게됩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불안함이 커서 선듯 이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

나의 불안함은 언제 할 지 모르는 경련. . .

아이는 스스로 체온 조절을 할 수 없어 외부에서 옷을 입히거나 벗기면서 냉난방 기구로 외부온도를 조절해 주어야 했고 감염에 취약해서 아프지 않게 해야 했으며 어설픈 움직임으로 다치지 않게 해야하고 무엇보다 언제 할지 모르는 경련을 대비해야 했습니다. 아이는 간질중첩증(스스로 잘 못멈추는 증상)으로 응급약을 항문으로 투약해야 했기에 다른사람이 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저는 어쩔수 없이 아이를 안전하게 케어한다는 명분으로 아이 스스스로 조절해보고 시도해볼 기회를 너문 않주고 의존적으로 키우게 되었었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기회가 왔을때 내가 챙겨왔던 이 모든것을 누군가에게 부탁하기엔, 설명할 것이 너무 많아 엄두가 안났고 쉽게 믿음이 안생겼습니다.

아이를 4시간이상 맡길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몇 명이 있나요?

아이가 어릴 때 들었던 부모교육이 있었습니다. 6개의 항목을 주제로 부모교육이 구성되었고 그중 사회성에 관한 강의가 있었는데, 경력이 많은 특수교사였던 강사분이 “아이를 맡길 수 있는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있습니까? 있다면 몇 명입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당시 저는 부모님 말고는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남편도 못 적었습니다. 강사는 앞으로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4시간을 봐줄 수 있는 사람을 60명을 확보하라”고 했습니다. 한 명도 없는데 60명이라니요. . . . 그렇게 많이? 사실 이유는 지금 명확히 생각나지 않지만 너무 당황스럽고 충격적이어서 아직도 질문만 기억 납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아이에게 나 이외에는 돌볼 수 없게 계속 사는 건 아이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좋지 않겠지요. 나도 입원해서 치료를 받아야 할 수도 있고 집안에 일이 생길 수 도 있고 나는 늙습니다. 영원히 내가 다 살펴주기는 어렵습니다. 그 때를 대비해야 한다는 겁니다. 실제로 이러한 일들이 금방 제게 닥쳤습니다.

내가 선택하지 않아도 돌봄이 필요했던 상황이 생기다

저는 일단 구하는 것도 미루었습니다. 가족의 지원이 있어 당장 시급하지 않기도 했지만 낮선 이에게 아이를 맡기는 것이 불안하고 내키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미루었던 일이 갑자기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도와주시던 친정아버지가 암진단을 받고 투병을 하셔야 했했습니다.전적으로 도와주시던 친정 부모님의 도움이 어려워 지자 장애인 활동지원 서비스를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구하고 나서도 많은 부분을 한동안은 제가 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연히 자리를 잠시 비운 사이 먹이던 것을 마저 먹여주시고 그렇게 조금씩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도 조금씩 믿음이 생기게 되었어요. 그 와중에 설상가상으로 저도 암진단을 받아 긴급하게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선택의 여지없이 강제로 아이를 맡길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제가 걱정하던 위험한 상황은 생기지 않았어요.

기관을 이용하기 시작하다

이런 연습의 과정을 거쳐 아이를 기관에 보내보기로 했습니다. 아이가 발달하기 위해선 다양한 자극이 필요한데 다양한 사람으로부터도 받을 수 있고 사회성이 발달 할 수 있을것 같아서죠. 사실 아이가 좌절하지 않고 다치지 않기를 바라지만 아이는 그럼 성장 할 수 가 없잖아요. 넘어져봐야 일어나는 법을 배울 수 있고 상처받아야 스스로 극복하는 법을 배울 수 있기에, 엄청난 고민끝에 여러형태의 기관중 바로 집앞에 병설초 유치원 특수반에 입학시켰습니다. 그리고 한번 맡겨보니 제가 걱정한거보다는 별일이 생기지는 않았어요. 용기가 조금 났죠.
처음 아이를 입학시키고는, 경련을 하는 아이라 불안함이 컸던 이유도 있지만, 집에 가지 못하고 근처 5분 거리에서 1달 이상을 배회했습니다. 잠깐씩 살짝 보러 가기도 했어요. 다행히 선생님 이 이해해 주셨어요. 아마도 많은 장애아동의 부모들이 저와 같았나봐요. 선생님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걱정 마세요"라고 해주시고 다양한 시도하고 있는 방법들을 공유해주시고 하루 이틀 그렇게 별일 없이 시간이 지나가자 조금씩 마음이 놓였던 것 같아요. 그러다 반나절 지내고 점심을 먹고 하원하던 아이가 어느 날 오후 4시까지 체험학습을 간다고 해서 또 고민을 했습니다. 처음엔 안 가겠다고 했더니 “선생님이 걱정 말고 보내라 잘 할 수 있을 거다"하셔서 보내기로 하고는 따라가겠다고 했더니 또 괜찮다고 설득하셔서 아이만 보내기로 했습니다. 체험학습 당일 아침에 큰 배낭에 필요한 것들을 챙겨 갔다가 “어머니 무슨 1박2일로 여행가요? 다 빼셔도 돼요. 걱정 마세요. 잘 챙길게요"하시며 싸가지고 갔던 비상약이며 추울 때를 대비한 여벌 옷, 로션, 수건, 먹을 것 등등 다 빼시고 거즈 손수건만 하나만 본인 가방에 챙기시며 가방 채로 돌려주셨지요. 조금은 무안하고 창피했는데, 온 마음으로 잘 챙길테니 믿고 보내 달라셨던 선생님의 웃는 얼굴이 지금도 선합니다.

관계와 삶의 폭을 넓혀가다

그렇게 조금씩 경험을 하면서 아이는 나와 떨어져 다른 사람들과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고 사람들의 수도 늘어났습니다. 전보다 쉽게 아이를 맡길 수 있게 되었고 또 아이가 느리지만 조금씩 성장하면서 점점 더 많은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어요. 작은 이사짐 수준으로 들고다니던 짐들로 하나씩 줄이게 되었어요.
10여 년이 흐른 지금에 다시 한 명 한 명 이름을 적어보면 아직도 60명은 안됩니다. 아무리 짜내어 꼽아봐도 30명이나 될까요? 하지만 전보다 훨씬 이름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 그 누구든 4시간 정도는 맡길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아이를 맡길 수 있는 사람이 60명이 되면, 이 목표는 어떻게 보면 우리 아이가 독립적인 생활을 목표로 하는 것과 맞닿아 이 사회에서 내가 없이 아이가 살아나갈 수 있게 됨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하고 지금에서야 그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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